이미지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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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현대사회는 영화, 텔레비전을 포함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모든 영역이 이미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이미지 전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대중매체는 더 이상 사회의 모든 영역과 대중 사이를 매개하는 차원을 넘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생산해내고, 대중으로 하여금 이미지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도록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니얼 부어스틴에 따르면, 천재지변이 아닌 대부분의 사건이나 행사 따위가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기 위해 꾸며진 '의사사건'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의사사건의 발생은 미디어에 보도되거나 재생산되기 편하도록 계획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언론은 이 '의사사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사회의 각 영역, 심지어 사회운동까지도 언론과 함께 의사사건을 공동 연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따라서 인터뷰, 각종 행사, 베스트셀러, 유명인사 등은 대부분 의사사건이자 그 생산물에 불과한 셈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에서 마돈나까지
커뮤니케이션 또는 신문방송학 연구자의 영역을 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론학자의 관심영역은 그 어떤 학문보다 광범위할 수밖에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사상사'도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거나 그 구조와 관행에 관련하여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사상 또는 그와 관련된 행동은 탐구할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룬 모든 인물들이 다 그런 '이미지와의 전쟁'이라는 테마와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이미지와의 전쟁'은 하나의 관점이다. 물론 더 큰 관점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나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각 인물의 사상과 실천을 보고자 한다. 예컨대 나는 부르디외 전문가가 아니지만 내 글을 부르디외 전문가가 쓴 '부르디외론'과 비교해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니,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7쪽)
이 책에 실린 인물 가운데 어떤 인물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사상을 직접 역설하기도 하지만, 어떤 인물은 단지 행동만 한 사람도 있다. 지은이는 대중스타인 마돈나와 의류 사업가인 베네통 역시 한 사람의 사상가로서 그 반열에 올려놓고, 이 모든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인물과 사상'인 셈이다.
대표적인 프랑스 지식인 부르디외에서 영원한 대중의 우상 마돈나까지 11명(토스카니 포함)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실천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사상과 이론은 그 인물이 존재하는 시공간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사상과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역사성을 상실하고 추상화되거나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속에서 외국의 사상이나 이론이 수용되어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의와 역할을 가졌는지는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어떤 주의나 주장이 그 시·공간적 맥락과 상황에서 이탈해 떠돌아다니다 보면 현실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다.
지은이는 언론학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자주 직면했고 자여스럽게 인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사상과 이론은 그 출처나 배경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 이해의 총체성을 위해 강준만 교수는 그 동안 인물과 배경을 중요시 해왔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앨빈 굴드너가 주창한 '성찰적 사회학'의 핵심, 즉 "사회학자가 자신과 사회세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명제에 닿아 있다.
이 책은 11명의 인물에 괂나 독립적ㅇ니 글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다. 모든 글에는 지은이 한 사람의 관점과 평가가 일관되게 녹아 있고 서로 맞물려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중심 의제와 관련된 세계 사상사가들과 주요 매체를 풍부하게 접하게 됨으로써 현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해를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저자소개
그의 공식적인 이력은 위와 같이 간단하다. 그러나 그에게 따라붙는 애칭(?)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며 갖가지이다. 초기에 그의 실명비판과 직접화법은 '지독한 냉소와 직접화법 무장, 비평의 칼 뺀 '한국논단의 게릴라', ''성역'깬 실명비평의 매서운 칼날''에서 '독설 ', '독선적 글쓰기', '선정적 글쓰기' 라는 혹평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서로에 대해 직접적 비판을 피하고 서로의 밥그릇과 명예를 챙겨주는 데 여념이 없었던 지식인 계층과 문화계 인사들을 공격한 대가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때 또 하나의 '오만한 문화권력'으로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로 강준만식 비평은 갖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논쟁지점을 양산해왔다. 그리고 그의 비평은 단순히 언론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각 분야, 정계·문화계·여성계 등등의 쟁점에도 참여하거나 문제제기 하는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폭넓은 게릴라전을 시도하며 '투계'와 같은 호전성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도 실명비판을 넘어서 제대로 된 논쟁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저력이 부족한 까닭이고, '상식인'의 시각에서도 아직 문제제기의 여지가 많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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