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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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세계 불교미술사를 압축한 거대 미술관, 돈황석굴
중국 전진(前秦)시대인 4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천6백여 년 전 승려 낙준에 의해 시작되어 서위-북주-수-당-5대-송-원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1천 년에 걸쳐 하나씩 조성되어온 돈황 막고굴. 장장 1,600여 미터에 걸쳐 여러 층으로 뚫린 이 석굴군은, 현재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492개이고 그 안에 그려진 벽화의 총면적은 4,500평방미터로 그것을 1m의 폭으로 이으면 45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또한 돈황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이며 동서문화의 교차지였던 탓에 1천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역대로 이 지역을 지배한 한족, 호족, 서역인, 티베트 등 다양한 세력의 유력자들에 의해 석굴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돈황을 중심으로 한 방대한 주변 지역의 불교문화가 혼융된 불교미술 양식의 변천과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돈황의 석굴군이다. 이곳이 '사막 속의 거대한 미술관'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 아름다움에서뿐만 아니라 이렇듯 세계 불교미술의 시공간적 압축판이란 성격 때문이다.
대중을 위한 본격적인 돈황석굴 입문서
이 책은 운강석굴, 용문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사원으로 일컬어지는 돈황석굴에 대한 생생한 소개서이다. 학창시절부터 돈황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었다는 저자는 NHK 실크로드 취재팀의 일원으로 한 달간 돈황 현지에 머물며 조사하고 취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이 답사 경험이 이 책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독자들은 그 동안 역사책이나 TV 동서양 문명에 관한 특집 프로그램에서 간간이 접하며 가졌던 돈황석굴에 대한 어렴풋한 신비감을 하나하나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직접 발을 들여놓고 눈으로 확인한 현장감을 전문적인 지식과 넓은 식견으로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예술의 감상을 넘어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시대상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냄으로써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150여 컷에 이르는 화려한 사진자료는 이해와 이런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불교미술사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책을 읽고 그림을 따라가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돈황을 답사한 경험이 있는 불교미술사 전공자(박도화:경주대 겸임교수·동국대 박물관 전임연구원)의 꼼꼼하고 치밀한 번역이 돋보이며 전문 용어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역자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있었지만, 일정한 수준과 깊이를 유지하며 대중들과 호흡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책은 해외 관광이나 풍물기행 유의 책들과 전문서의 간극을 이어 주고, 세계사적인 인류 문명의 이해 속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자리매김하는 데 폭넓은 시야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할 만하다. 이제 돈황석굴은, 이역만리 외딴 곳에 있는 유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상을 풍부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다가온다.
천년의 미, 천년의 역사
막고굴의 소상(塑像)군과 벽화들은 원래의 색채를 대부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거대한 규모와 함께 실크로드의 문화유산으로 첫손에 꼽힌다. 이 예술작품들은 천년을 훨씬 넘는 시간의 경과를 잊게 할 정도로 화려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주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초기와 수·당대 굴 가운데 대표적인 굴의 조각과 벽화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 초기의 굴: 5호16국에서 북주까지(4세기 중엽∼6세기 중엽) 2백여 년 동안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이 시기는 중국에 불교가 들어 온 보급기, 요람기였다. 축법호, 구마라습, 불도징, 법현 등의 승려가 인도·서역에서 불전을 가져와 포교에 힘썼던 시기에 해당한다. 돈황 막고굴 가운데 수나라 이후의 대다수 굴이 완전히 중국화한 데 비해 이 초기 굴에는 서역의 영향이 남아 있다. 중국식 의복을 걸친 단정한 본존불과 특이한 형상의 서역신이 나란히 있는 경우도 있다.
◆ 수·당대: 수나라는 겨우 37년간의 단명한 왕조였으나 통일왕국으로서 위세가 당당했고, 멀리 서역 경영에도 적극적이었다. 초대 문제(文帝)는 스스로 열성적인 불교신자였으며, 북주를 쓰러뜨리고 중원을 통일한 것도 불교도의 힘을 배경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하여, 즉위와 동시에 불교 부흥과 보호에 착수했다. 이러한 사정은 돈황 막고굴에도 파급되어 짧은 기간 동안 무려 79개나 되는 굴이 조영되었다. 수를 계승한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동서교역을 한층 발전시켜 수도 장안은 인구 1백만을 헤아리는 국제도시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장안에만도 90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이 시기 돈황도 불교도시로 번창했는데 당시 인구 2만의 이 도시에 승려가 약 1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돈황 불교의 성황을 배경으로 막고굴에 석굴을 만드는 일도 활발해져 당나라 때 조영된 굴은 전부 232개에 이르렀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전체 막고굴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다. 그 가운데 45굴의 칠존상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인간미가 넘치는 부처의 10대 제자 가섭과 아난이 양쪽에 있고, 그 옆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지긋이 눈감고 있는 보살상 둘은 지금 보아도 탄복할 정도로 아름답고 관능적이다(78∼81쪽).
◆ 돈황은 신라의 저 유명한 혜초 스님이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며 왕오천축국전은 후대에 바로 이돈황 막고굴(제17굴)에 쌓여 있던 문서더미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수많은 불교미술품과 고문서류는 동서문화교류사와 불교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막고굴의 벽화에서 특징적인 비천(飛天)은 거의 모든 굴에 묘사되어 있는데, 시대가 내려오면서 양식이 점차 세련되어 간다. 당나라 때의 321굴의 것은 그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서 완결판이라 할 만한데, 신라의 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상의 원형을 발견한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그 시기 불교가 국제적인 문화교류에서 담당한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126∼129쪽).
◆ 16굴에 부속되어 있는 듯한 작은 17굴 장경동에서 대량의 서화와 경권이 발견되어 20세기 초 영국의 고고학자 A. 스타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 P. 펠리오 등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반출된 문물들이 지금도 구미 각국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 서구의 탐험대나 여행자들에 의한 훼손과 반출행위는 아직 막고굴 군데군데에 벗겨진 상처로 남아 있다(147∼148쪽)
◆ 화려한 예술작품 뒤안에 당시 벽화를 그리고 조각을 한 화공들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화려한 예술가가 아니라 농민 등 일반 민중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생활과 고락을 나눈 노예와 같은 존재였다. 막고굴에는 화공과 조각공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은 오랜 세월 빈궁한 생활을 하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사막의 거대한 화랑을 남겼던 것이다. 막고굴의 북쪽 끝에는 당시 고향을 떠나 멀리 이곳까지 온 화공들이 거주하던 토굴이 있다. 침대, 촛대, 난로, 굴뚝이나 그을음의 흔적은 불을 피우며 추위를 견뎌내던 그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150∼153쪽)
저자소개
사진 오츠카 세이코: 도쿄사진대학 졸업. 일본사진가협회 회원으로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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