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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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한국정치에 있어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듀오'다. 따라서 김대중을 바로 보지 않고선 김영삼을 바로 볼 수 없고 김영삼을 바로 보지 않고선 김대중을 바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김대중 죽이기』를 쓴 저자의 후속 작업이 '김영삼'을 소재로 삼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김영삼 이데올로기』는『김대중 죽이기』의 속편인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 운영 구조와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깜짝쇼로 대표되는 김영삼식 정치의 근본 바탕이라 할 '승리 이데올로기'("역사는 승리자만을 기억한다")와, '게임의 룰'을 방기해가며 그것이 가능하도록 돕는 언론과 지식인 문제(독선과 탐욕과 의리), 또 그런 것이 먹혀드는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 풍토(패거리짓기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책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의 현 정국이 왜 이토록 난맥상을 보이는지, 그 원인에 대한 진단과 처방도 시도해 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조선시대 용어로 일종의 상소(上疏)라고 말한다. 완곡어법과 추상어법을 버린 직설이어서 맹목적인 김영삼 비판으로 읽혀질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충정어린 고언이란 얘기다. 고 문익환 목사의 "김영삼 정권의 실패는 우리 모두의 실패이므로 그를 도와줘야 한다."는 뜻에 대한 적극 동의에서 점차 절망의 나락으로, 그러나 거기서 이제 다시 '마지막 희망'을 끌어내려는 노력이 그 이면에 깔려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는 글」이 '김영삼을 살려야 한다'이고,「닫는 글」이 '김영삼은 살 수 있다'인 것이다.
목차
여는글/ 김영삼을 살려야 한다
첫째마당 김영삼의 '승리 이데올로기'
- 김영삼의 오만과 독선
- 대통령이 되는 게 목적이었다
- 김영삼의 자기도취
- 김영삼의 '역사'는 선거
- 김영삼의 '역사'는 여론
- '승리 이데올로기'가 낳은 원죄
둘째마당 '승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정치
- 김영삼의 스펙타클 정치
- 문민정부의 군사작전
- 김영삼도 모르는 '세게화'
- 김영삼은 '무면허 운전사'인가?
- 김영삼은 '부산대통령'인가?
- '정치 9단' 통일에는 '9급'
셋째마당 '자질'을 은폐하는 '탐욕'과 '의리'
- 김영삼의 실언과 자질
- 김영삼의 매력
- '오빠부대'로 전락한 언론
- 지식인의 제2의 '오빠부대'
- '돌격대'로 변신한 지식인
- 김영삼의 용인술
넷째마당 김대중은 살아있다
- 김영삼의 '김대중 콤플렉스'
- 지역등권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박찬종과 백기완에게
- '김대중 죽이기'라는 정치편의주의
- 김대중을 죽이는 '도덕완벽주의'
닫는글/ 김영삼은 살 수 있다
머리말
□ 결코 '양김'이 아니다
나는 『김대중 죽이기』를 낸 후, 독자들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전화를 통해 들은 반응과 사람들을 만나 직간접적으로 들은 반응도 수백 건에 이른다. 대부분 나의 작업에 대한 찬사와 격려였지만, 비판도 있었다.
그런데 그 비판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내가 김대중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반면, 김영삼에 대해선 대단히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 반응이 나올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결코 그런 반응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을 제대로 알지 못하듯이, 김영삼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사실 『김대중 죽이기』에서는, 주인공이 김대중이었기 때문에 굳이 김영삼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적잖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김영삼에 대한 기존 허상은 그대로 둔 채 나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진심을 말하자면, 오히려『김대중 죽이기』는 김영삼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김대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에서만 김영삼을 비교의 대상을 삼아 평가했을 뿐, 김영삼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피해갔던 것이다.
김영삼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김영삼에 대한 호감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김대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버리는 게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우리 국민의 머릿속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듀오'다. 그들을 따로 떼어내 평가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김대중을 바로 보지 않고선 김영삼을 바로 볼 수 없고, 김영삼을 바로 보지 않고선 김대중을 바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정신세계에서 그들은 오랜 기간 그렇게 뒤엉켜 살아왔기 때문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들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등가'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 둘의 끝없는 경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박찬종과 같은 전형적인 양비론자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사람들의 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비단 박찬종 지지자들만 김영삼과 김대중을 '등가'로 보는 게 아니다. 언론과 대다수 지식인들이 김영삼과 김대중을 늘 '양김'으로 표현해 왔지 않은가.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과연 '양김'으로 뭉뚱그려져도 좋을 만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걸까? 혹여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설사 그 차이가 그들의 반독재 투쟁시엔 무의미했다 할지라도, 반독재 투쟁의 구호가 빛이 바랜 90년대에까지도 그 차이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면 그건 또 무슨 까닭에설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려는 노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고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김대중 죽이기』의 속편인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 운영 구조와 방식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김영삼의 위대한 민주화 투쟁 경력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 기억이 희미해졌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기억을 되살려내야 한다. 이 책이 아주 드물게나마 김영삼의 과거 민주화 투쟁경력마저 비판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해서, 그것이 감히 김영삼 민주화 투쟁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가치는 영원히 신성하다. 오히려 나는 우리 사회에 열병처럼 번져가는 '과거 잊기 운동'과 '과거 왜곡 운동'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독재자가 미화되는가 하면, 민주화 투쟁 경력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폐기처분하려는 음모를 나는 단호히 거부한다.
80년대 중반부터 등장해 지금까지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른바 '양김 청산론'에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 문익환 목사는 지난 93년 3월 6일, 안동교도소에서 출소하면서 "김영삼 정권의 실패는 민족사의 총파탄이기 때문에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김영삼 정권은 실패의 수렁으로 점차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원인은 김영삼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그의 김대중과의 관계에 있다.
김영삼은 "역사는 승리자만을 기억한다."고 했다. 나는 김영삼이 진실로 역사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무엇이 진정한 역사이고,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 김영삼은 그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실패하고 있다. 지금 김영삼 정부의 문제는 단순히 개혁을 잘 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역사이며,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 이 책은 김영삼에게 보내는,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것도 완곡어법과 추상적 어법을 버린 단도직입적 방식으로.
보통사람도 자신이 제3자에 의해 글로 발가벗겨진다면,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어떤 대통령은 자신이 보통사람이라고 떼를 썼지만, 대통령이 보통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리더십의 가치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통령은 오히려 보통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가벗겨질 의무가 있다.
지금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나의 선의와 다르게 이 책이 오독될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 책은 김영삼 자신도 평소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를 김영삼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게. 시시껄렁한 스캔들 따위를 파헤친다는 게 아니라, 김영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기본 메카니즘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코 맹목적인 김영삼 비판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런 충정어린 시도가 그저 단순한 '김영삼 비판'으로 읽힌다면, 그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내 무능이 입증되었다는 의미에서 불행한 게 아니다.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시도한 나의 작업이 그럴진대, 앞으로 김영삼에 대한 어떤 직언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에서다. 따라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데는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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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8월 강 준 만
저자소개
그의 공식적인 이력은 위와 같이 간단하다. 그러나 그에게 따라붙는 애칭(?)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며 갖가지이다. 초기에 그의 실명비판과 직접화법은 '지독한 냉소와 직접화법 무장, 비평의 칼 뺀 '한국논단의 게릴라', ''성역'깬 실명비평의 매서운 칼날''에서 '독설 ', '독선적 글쓰기', '선정적 글쓰기' 라는 혹평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서로에 대해 직접적 비판을 피하고 서로의 밥그릇과 명예를 챙겨주는 데 여념이 없었던 지식인 계층과 문화계 인사들을 공격한 대가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때 또 하나의 '오만한 문화권력'으로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로 강준만식 비평은 갖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논쟁지점을 양산해왔다. 그리고 그의 비평은 단순히 언론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각 분야, 정계·문화계·여성계 등등의 쟁점에도 참여하거나 문제제기 하는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폭넓은 게릴라전을 시도하며 '투계'와 같은 호전성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도 실명비판을 넘어서 제대로 된 논쟁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저력이 부족한 까닭이고, '상식인'의 시각에서도 아직 문제제기의 여지가 많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서로『인물과 사상』제1권~제22권 『김대중 죽이기』 『전라도 죽이기』『김영삼 이데올로기』『김영삼 정부와 언론』『언론권력도 교체하라!』『대중매체 이론과 사상』 『카멜레온과 하이에나』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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