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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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정치인의 사과’를 다룬다고? 그것에서 의미와 가치를 캐낸다고? 흔해빠진 데다 뻔할 뻔자인 그것에 도대체 들여다볼 무엇이 있어서? 그러나 이 책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의 저자 김욱은 되묻는다. 정치인의 사과가 그리 하찮은 것이라면, 예컨대 정치인생 15년 내내 버티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뒤에야 마지못해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는 수준의 사과를 한 박근혜나, 금전적 피해보상을 마다해가며 일본 의회의 ‘공식 사과’ 한마디를 듣기 위해 20년간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저자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무엇이 정치인들을 사과하게 하는가? 그 사과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가? 지난 대선 주요 후보자들의 잇따른 사과 릴레이에서 출발한 저자의 이런 물음은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주요 정치적 사과들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사과, 친일파의 사과, 이승만의 사과, 전두환의 사과, 문재인ㆍ박근혜ㆍ이정희의 사과……. 그러나 무릇 정치인의 사과치고 당사자들이 단번에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경우가 있던가? 이에 저자는, 그들의 정치적 행위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끈질긴 투쟁과 요구가 사과를 강제로 끌어낸 과정을 톺아보며 그 끝없는 힘겨루기를 통해 우리 역사가 끊임없이 재정립되어왔음을 밝혀낸다. 하여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정치적 사과를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전쟁, 그 한가운데를 관통해가는 도저한 역사의 물줄기를 목도하는 감동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사과는 역사의 전리품이다
"5ㆍ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이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본 분들과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2012년 9월 24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
자신의 정치적 원천인 제 아버지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나서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얻은 박근혜 당선인. 자신의 사과가 앞으로 정치적 부침의 매순간마다, 공약이었던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또는 진정성을 묻는다는 이유로 끈질기게 되새겨질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회와 명분의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어떻게든 그 사과를 뒤집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려고 할까? 바로 이 지점이 역설적으로, ‘박근혜의 사과’야말로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가 얻어낸 최대 수확이자 역사의 전리품임을 잘 보여준다.
우선, 정치적 사과란 현실적 이해에 떠밀려 나오게 된다. 선거의 당락이든 외교상 실리든 정치적 사과엔 이불리에 대한 판단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박근혜는 중도표를 위해, 문재인은 호남표를 바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독일과 일본은 주변 공동체에서 인정받기 위해 오랜 역사적 과오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결국 힘의 크기, 권력의 역학이 사과 여부를 결정한단 말일까? 저자는 이 결론에 반만 동의한다. 현실 권력과 역사 헤게모니를 장악해나가는 싸움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과거의 상처를 잊지 않고 계승하며 현실에 저항할 줄 아는 연대야말로 사과를 끌어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역사적 정의를 믿는 ‘기억의 힘’이라 명명한다.
박정희ㆍ전두환 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그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낸 것은 단순히 교과서에 독재가 나쁘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독재로 고통받은 이들이 끈질기게 저항하며 그 기억을 대물림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미 대통령 클린턴이 자국 내 흑인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까지 날아가 수백 년 전의 노예무역을 사과한 것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무오류설을 스스로 부정하며 2000년간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종교적ㆍ정치적 죄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것은 시간의 길이에 관계없이 인간이 기억을 놓지 않는 한 역사의 상처는 반드시 치유된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억의 힘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만약 사과가 없다면, 사과가 참회의 표현이 아니라면,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정치적 압박에 의해서만 사과를 받아낼 수밖에 없다면 ‘기억의 힘’이라는 것도 결국 ‘힘이 곧 정의다’라는 말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을까? 다르다. 힘이 곧 정의라면, 이념적으로는 힘에 저항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현실적으로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힘’이란 정의를 믿는 힘이다. 그것은 한낱 당위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경험적으로 입증된 힘이다. 분명히 힘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경험적 진실이 아니다. (…) 기억의 힘은 현실적 힘이 없을 때조차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투쟁한다. 현실적 힘이 없을 때도 의심 없이 순응하는 것과 의심하며 살아가는 것은 큰 차이다. 힘이 정의가 아니라 언젠가 그 정의가 힘이 되는 것이다.- 229~230쪽
사과를 강제하는 자 vs 사과를 부정하는 자, 그 끝없는 힘겨루기
정치적 사과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사과를 받아낸다고 해도 그것은 지난한 힘겨루기의 서막일 뿐이다. 사과를 요구하고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 반대편에 늘 그 사과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핑계는 다양하다. ‘민족사랑’이나 ‘대세’를 핑계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거나(이광수와 서정주), 공/과를 비교형량하자고 주장하거나(식민지 근대화론 또는 박정희의 지지자들), 아예 사과의 원인이 된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아베 신조), 일단 사과를 하되 이후 계산된 침묵으로 사과 자체를 망각하려 들거나(친노 세력),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역사적 복권을 시도(이승만 지지자들)한다.
정치적 사과를 부정하는 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과를 방해하며 나아가 사과로 정립된 역사에 대해 뒤집기를 시도한다. 이에 맞서 사과를 공식화ㆍ역사화하려는 이들은 그들과 현실적 힘관계의 마당에서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벌이게 된다. 저자는 이 힘겨루기의 역사를 두 개 장에 걸쳐 소개하며 정치적 사과를 부정하는 자들의 논리와 현실인식을 차례차례 논파해낸다.
정치적 사태는 아무리 악한 행위라 할지라도, 설령 악마 같은 행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행위로부터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 이익이 적극적 이익일 수도 있고, 소극적 이익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사력을 다해서 자신을 방어할 뿐이다. 악마라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리라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 따라서 정치적 사과란 이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총체적인 힘관계를 끊임없이 재정립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1~12쪽
하여,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지난 대선은 박근혜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많은 이들이 ‘멘붕’을 호소하며 역사의 반동을 걱정한다. 역사가, 정의가 패배한 것일까? 아니다. 박근혜는 독재자 아버지를 찬양하며 이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승계한 최대 정치적 자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서야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오히려 역사는 박근혜에게 사과를 강제할 수 있는 딱 그만큼 진보했다. 패배한 문재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승자가 제 공약을 흔히 권력으로 뭉개듯 패자의 무력함을 핑계로 얼버무릴 수 있을까? 아니다. 문재인의 사과로, 친노에겐 영남패권주의가 불러온 영호남 개혁세력간 이데올로기 단절을 해결할 책임이 지워졌다. 그리고 호남 유권자들은 그 사과를 역사의 전장에서 지켜낼 숙제를 떠안게 됐다. 역시 그 책임과 숙제의 무게만큼 역사는 진보한 것이다.
이 책은 감수성 충만한 ‘힐링’이나 ‘멘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는 박근혜의 당선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유권자의 역사의식 운운하는 대신 선거 국면이 사과를 강제함으로써 독재자의 딸이 쥐고 있던 역사 전쟁의 칼자루가 국민 손에 왔음을 일깨운다. 정치적 사과를 둘러싼 역사가 말해주듯 그녀는 끊임없이 사과 번복과 역사 전복을 시도할 것이다. 이 싸움은 어떻게 전개될까? 저자의 전망은 이렇다.
정의로운 개인은 지칠 수 있지만 역사는 지치지 않는다. 부정의한 정치가 승리할 수는 있지만 역사를 이길 수는 없다. 역사의 주인인 민중들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지만 지치지 않고 옛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정치로부터 기어이 왜곡된 과거에 대한 사과를 받아낸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지치지 않는 역사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 영원한 역사가 태초까지 거슬러간 옛이야기를 꺼내며 정의를 묻는다. 그러므로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나는 그런 역사의 힘을 믿는다.- 24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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