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위험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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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 파시즘 위에 선 십자가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어야 한다” - 2012년 6월, 동성애 문제와 관련해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밋 롬니가 밝힌 입장. 모르몬교도로서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롬니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표밭을 의식해 말을 바꿨다. 동성애자였던 롬니의 안보담당 대변인은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 하야 운동과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다” - 2011년 2월, 정부가 이슬람채권법(스쿠크법)을 추진할 무렵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조용기의 발언.
“‘시조새’ ‘말의 변천’ 등 진화론의 대표적 논거로 여겨졌던 핵심 콘텐츠들이 과학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있다. 한 기독교 단체의 청원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2012년 5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밑돌 가운데 하나인 정교분리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중세 왕권과 교권이 벌인 기싸움에서 잉태된 이 원칙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의 근간으로 자리매김한 까닭은 종교적 열정이 품고 있는 배타성과 폭력성 때문이다. 21세기 들머리에 유행한 ‘문명의 충돌’이란 화두는 결국 종교적 열정이 나라밖으로 분출돼 일어난 다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은 그러한 종교적 열정이 비만 상태에 이른 미국 기독교 우파, 좁게는 주권운동(dominionism)이라 불리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해악을 고발한다. 이 책은 팻 로버트슨이나 제임스 돕슨, 폴 크라우치 같은 기독교 우파 슈퍼스타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한때 주권운동에 가담했거나 여전히 거기 몸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들의 언행과 멘털리티가 기독교적 가치보다는 파시즘에 인접해 있음을 실감나게 보고한다.
저자 크리스 헤지스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무슬림이 아니다.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도 아니다. 독실한 장로교회 목사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며 한때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일급 저널리스트다.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랑과 겸손이라는 기독교적 미덕을 잃고 오히려 미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판단에 이 책을 썼다. 간단히 말해, 『지상의 위험한 천국』은 거짓 예언과 가짜 선지자를 경고하는 현대판 『베드로의 편지』이자 기독교 바깥의 시민들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벽서다.
파시즘에 바싹 다가선 기독교 우파
파시즘 이론의 대가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을 판단할 때 말이나 이론이 아닌 ‘행동’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한다. 독자들은 저자가 살핀 미국 기독교 우파의 행적이 움베르토 에코가 규정했으며 이 책의 서문을 대신하고 있는 「파시즘을 식별하는 14가지 방법」과 놀랍도록 유사한 몇몇 대목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의 숭배: 예컨대 기독교 우파는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라는 창세기 30장을 근거로 티라노사우르스가 초식공룡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축자적·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은 재론과 반론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169~170, 186쪽)
좌절의 에너지: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의 최대 요람은 4년간 25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며 ‘가난한 미국’의 대명사로 전락한 오하이오주다. 또한 오하이오에는 미국 최대 규모인 79개의 백인민족주의단체가 적을 두고 있는데 이 둘은 좌절한 사람들의 분노를 땔감으로 제 목소리를 높여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72~76쪽)
불일치는 배반: 그들은 세상을 기독교인(우리)과 불신자(적)로만 구별한다. 이 도식에서 다름은 곧 틀림이며 무질서다. 동성애자와 이교도는 “개종되고 전향하고 치유되어야 할”, 경우에 따라서는 “박멸해야 할” 질병이자 원흉이다. (5장 박해)
행동을 위한 행동의 찬양: “믿어라, 따라라, 그리고 행동하라”는 무솔리니의 말과 “믿고, 찬양하고, 행동하라”는 주권운동가들의 슬로건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가? (281쪽)
남성주의의 기원: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에베소서 5:22) 주권운동 가운데 하나인 ‘프로미스 키퍼스’의 10만 집회에서는 여성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인기있는 기독교방송프로그램 <더700클럽>의 진행자로 명성을 누렸던 다누타 파이퍼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결혼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남성만이 리더의 지위를 가지며 여성들은 노동력에서 제거돼 집에 머무는 것이 미덕이다. 그들은 오늘날 미국의 쇠퇴조차 “남성적 용맹의 위축”으로 해석한다. (125, 136, 140~141쪽)
이밖에 빼놓을 수 없는 파시즘의 징후로 단어의 가치와 의미를 전복해 선전도구로 사용하는 ‘언어조작’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적지 않은 지면을 들여 이 로고사이드(logocide), 다시 말해 단어를 죽이는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단어에 대한 낡은 정의는 새로운 정의로 대체된다. (…) ‘진리’ ‘지혜’ ‘죽음’ ‘자유’ ‘생명’ ‘사랑’ 같은 단어들은 세속적 세상 속에서 그 단어들이 의미하던 것을 더 이상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과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과 그리스도를 향한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나 불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거의 무관하게 믿음 체계에 대한 헌신과 순종의 수준을 가리킨다. ‘자유liberty’는 자유freedom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순종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해방될 때 발견되는 자유이다. 가장 치명적으로 왜곡된 단어는 ‘사랑’인데, 그 단어는 자신들의 고립과 소외에 맞서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주권운동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사용된다. 이들의 맥락에서 ‘사랑’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절대 복종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포용하는 인간적 사랑은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열등한 사랑으로서 공격을 받는다. (32~33쪽)
교회, 국가를 접수하다
미국은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하며 백악관이 기도회 장소로 애용되는 친기독교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정교분리를 명문화한 민주주의 국가다. 기독교 우파의 거물인 팻 로버트슨이 19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담임목사직을 상실한 것이나, 4년 뒤 유명 목사이자 방송설교가였던 대니얼 리틀이 빌 클린턴을 비방하는 신문광고를 낸 것을 빌미로 미 국세청이 그의 교회에 대한 면세혜택을 박탈한 사례는 그러한 원칙이 최소한 공공의 영역에서는 살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은 어떠한가.
저자는 공적 영역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급진적 기독교 우파의 주류가 미국 정치의 양대 주주 가운데 하나인 공화당을 접수했다고 말한다.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던 200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구한 것은 기독교인연합, 독수리포럼, 가정자원협의회 등 3대 우파기독교단체가 몰아준 80~100퍼센트라는 기록적 지지였다. 2004년 대통령선거에서 투표자의 1/4은 자신이 ‘복음주의적 가치’에 따라 투표했다고 밝혔다. 부시는 이러한 ‘복음이 깃든 표’의 78퍼센트를 쓸어 담았다. 저자가 진행한 인터뷰와 취재기는 2004년 대통령선거에서 조지 부시를 당선시키기 위한 움직임에 기독교 우파 정치인들이 깊숙이 개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을 밝힌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쟁에 참여한 무장경비업체나 급진적 기독교인 장성들의 언행을 추적, 전쟁을 이끈 군산복합체의 물밑에 기독교 파시즘의 호전성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고발한다.
뿐만 아니다. 주권운동을 첨병으로 한 기독교 우파의 공세는 미국 시민사회를 뿌리까지 흔들고 있다. 2004년에 시행된 한 여론조사에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미국인은 13퍼센트인 반면, 창조론을 지지하거나 진화의 주체를 신으로 보는 응답자는 83퍼센트에 달했다. 오늘날 방송과 출판 등 돈 되는 ‘하나님 사업’을 통해 새로운 지배계급을 창출한 이들은 기독교 윤리가 자본주의적 가치와는 딴판임에도 현대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불평등과 착취구조를 축복한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와 부실한 의료서비스, 전무하다시피 한 노후보장에 그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기를 쓰고 당선시키려한 아들 부시의 집권기에, 연방정부의 복지재정은 교회와 그 산하 사설 복지단체에 집중 지원됐다. 그렇게 따낸 시민의 세금으로 그들이 저지르는 일이란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의회에 예외 없는 낙태 금지법안을 요구하며 진화론의 작은 맹점이나 자의적인 오해를 빌미로 정규교육과정에서 삭제하려 드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권운동의 속셈이 세속의 법을 성경의 룰로 대체함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을 기독교, 그것도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근본주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데 있다고 판단한다.
한국 교회는 파시즘에서 자유로운가
한국에서도 최근 한 종교단체의 청원으로 시조새와 말을 진화의 예로 소개한 부분이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소동이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웹사이트에 개설된 ‘동성애자 카페’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통보 없이 폐쇄되고 관련 회원들은 글쓰기 권한을 박탈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 기독교가 그간 보여온 극성맞음은 앞서 일들을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게 만든다.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헌금액수를 놓고 겨뤄보자” “불신자는 애낳지 말라. 전부 지옥 갈 텐데 뭣하러 낳는가?” 따위의 언사를 스스럼없이 내뱉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증명하듯 한국 주류 기독교의 권세욕과 폭력성, 자본 친화력, 하나님 왕국에 대한 열망은 복음주의의 본산인 미국에 밀리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파시즘이 미국 기독교 우파와 절친한 만큼 한국 기독교와도 근친 관계에 있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주권운동에 내린 “열린사회의 잠재적 원수”라는 평가는 한국 주류 기독교에 내려도 무리 없는 진단이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은 한국 교회와 시민사회가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역자_정연복: 1957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 『함께하는 예배』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트로츠키』 『신비주의 신학』『냉전과 대학』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등의 번역서가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명시』 『세계의 기독교 명시』 등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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