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사용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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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역사전쟁’이라는 말은, 으레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 일본의 독도 망언 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상대국과의 논쟁만큼 우리나라의 ‘역사내전’도 그 열기에 뒤지지 않는다. 해방전후사 특히 식민지기 규정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건국의 정당성 논란과 친일파 청산의 문제까지 그 국지전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기 때문이다.
논쟁의 횟수가 더해질수록 그 논쟁이 정확하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문제가 되었는지 실마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양측의 공방은 계속되지만 관전하는 사람들은 피로감만 더해간다는 느낌이다. 지금, 1세대 역사학자들에게 던지는 3세대 철학도의 문제제기인 『뉴라이트 사용후기』는 독자들에게 반가운 청량제가 될 수 있을까.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저자 한윤형은 2002년 참여정부의 출범과 2004년 뉴라이트의 출범에 뒤이은 한국 근현대사 논쟁, 특히 웹상에서 벌어진 네티즌들 간의 격렬한 논쟁을 종횡무진 누비며 근현대사 역사전쟁의 ‘종군기자’ 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뉴라이트와 민족주의, 그들의 데칼코마니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기본적으로 뉴라이트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서다. 총 14장으로 이뤄진 책에서 장별로 조목조목 뉴라이트 역사관을 따져보는 식이다. 흔히 뉴라이트를 비판한다고 하면, 반일 감정에 기반한 네티즌들이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비판하고 나선다. 그들이 대중의 감정을 자극해 뉴라이트를 인신공격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이어진다. 다시 말해, 반일 감정에 편승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한일 양국의 정치인이나 하는 일이지 역사학자가 나서서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학술논쟁 뒤에 숨어 있는 대중의 정치적 욕망과 이에 편승하는 지식인을 보면서, 저자는 자신이 아마추어에 불과하지만 이 논쟁에 뛰어들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위와 같은 대표적인 케이스로, 『뉴라이트 비판』(돌베게, 2008)의 저자 김기협을 거론한다. 저자는 김기협의 오류로 몇 가지를 꼽는다.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몰이해, ‘대안 교과서’에 대한 엇나간 이해, 뉴라이트의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에 대한 과도한 비판 등이 그것인데, 저자는 김기협의 이런 저술이 학문적으로 매우 엄밀하지 못하며 결국 그는‘대중의 정치적 욕망에 편승하는 지식인’밖에 되지 못했다고 논박한다.
그렇다면 뉴라이트를 어떻게 비판해야 한다는 것일까. 저자는 뉴라이트의 논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사회진화론, 경제결정론 등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경제적 증거를 경시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이념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발 더 나아가 역사논쟁이 매번 정치투쟁으로 와전되는 현상은 역사학을 초월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일을 하려면 김기협이 조소하는 ‘대안 교과서’의 필자들처럼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 전반이 협력해야 할 것이다. 학제간 연구는 언제나 조소받을 일이 아니다.”(이 책, 112쪽) 이와 같이, 저자는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해서 냉정한 논리의 칼을 들이댄다. 정확히 하자면 뉴라이트를 비판하기 위한 비판인 셈이다.
‘선택적 망각’과 ‘고아의식’―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의 문제점
저자가 보기에 이영훈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문제는 (반뉴라이트 진영이 비판하듯이)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정오표(正誤表)로 대조한다는 ‘수치계량화’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이 기존 역사학계에 던진 문제제기는 유효하다고 본다. 다만 뉴라이트들이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하는 ‘선택적 망각’에 빠져 있음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가 있었기에 조선의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주장에 공감을 표한다. 하지만 뒤이어 덧붙인 저자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단 그 경우엔 공정하게, 일본이 조선에 근대적 의미의 ‘학살’까지 들여왔다고 언급해야 한다.”(이 책, 161쪽) 이는 곧, 한일합방 초기에 벌어진 일제의 남한 대토벌이 1945년 이후의 한국전쟁,베트남전,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 벌어진 양민학살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을 공평하게 볼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 여러 곳에서 다시 돌이켜보는 역사논쟁(복거일 vs 고종석, ‘대안 교과서’ 파동, 이문열의 ‘친일파 청산 불가’ 발언 등)에 대한 저자의 비평은,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 양쪽 모두 그동안 얼마나 서툴게 서로를 논박해왔는지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글들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역사전쟁을 끝장낼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가 보기에 그동안의 논쟁은 불필요한 멍에에 불과해보인다. 저자는 몰역사적이냐는 비난을 감수하려는 듯 태연히 묻는다. 친일파 청산은 정녕 가능한 일이냐고.
“가령 우리는 을사오적을 친일청산의 대상으로 올릴 수 있는가? 그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신라 주도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춘추, 김유신을 '반민족 범죄자'로 처벌하겠다는 것만큼이나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가?” (149~150쪽)
이 말은 곧 ‘친일파 청산’의 기준을 세우는 데 있어‘민족 정서’에 기대기보다는 ‘보편적 이성’에 기대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폭로와 물타기 논쟁을 거듭하는 친일파 청산 문제를 세계 보편적 기준으로 성찰하고 토론할 때에만 친일파 청산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뉴라이트의 입장도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는 뉴라이트가 무조건 건국의 정당성만을 강변하는 태도를 몰역사적이라고 비판한다. 건국의 주체가 된 사람들 중에서도, 당시 민의를 총칼로 억압하며 간신히 국가를 지탱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저자 특유의 입담이 펼쳐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라는 것의 최초의 형성과정에서는 어디에서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렇게 물어야겠다. 그게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는 걸까? (자매품으로는 “‘친일’이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면, ‘친일파’임을 인정하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278쪽)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한 한국의 개혁 세력에 대한 비판에서 저자는 그들의 ‘고아의식’을 문제 삼는다. ‘고아의식’은 정치학자 故 전인권이 『남자의 탄생』에서 내놓은 개념으로, 홍길동을 비롯한 한국의 남자들이 아버지를 죽이지(극복하지) 못하고 갑자기 하직인사를 하고 떠나는 비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요지다. 저자는 민주화 이후의 개혁 정권들이 전임 대통령의 장단점을 계승하지 못하고 그들을 전면 부정하는 것 또한 ‘고아의식’의 한 예라고 지적한다. 386세대 등 개혁 세력은 뉴라이트의 ‘민주화 완성론’을 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386세대 자신의 정치적 환상에 대한 자기비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무현을 비롯한 친노 세력들 또한 ‘율도국을 세우려고 했던 홍길동’처럼 ‘고아의식’을 가진 존재들에 불과했다며 안타까워한다. ‘고아의식’이라는 저자의 렌즈로 보면 노무현은 곧 박정희였고 유시민은 곧 차지철이 된다. 결국 386세대의 ‘역사적 과제’였던 민주화는, 민중을 ‘내 말 듣는 시민’으로 오해했던 민중주의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스스로를 ‘탈(脫)민족주의자’라고 밝힌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 역시 ‘탈민족주의 관점에서 뉴라이트를 비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이다. 한일합방 100주년을 코앞에 앞둔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다문화 사회화’하는데 사회 구성원들이 여전히 역사전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저자의 주장은 몇 번이고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저자는 탈민족주의가 역사논쟁이라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수 있는 유일의 매개체라고 주장하진 않는다. 단, 현재의 대한민국이 탈민족주의적으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흐름상 불가피함을 지적하고 있다. 3세대 젊은이가 보기에 현재의 역사전쟁은 시대착오적인지 책 곳곳에 날선 비판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역사전쟁을 관전할 때엔, 굳이 독자들까지 표정을 굳힐 필요는 없다. 다행히도 저자의 글에는 명랑과 유머, 여유가 넘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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