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언니는 간다
페이지 정보
본문

도서소개
이 책은 뛰어난 필력을 선보이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십대 가운데 한 사람인 김현진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저자 김현진은 일찍이 열일곱에 숨 막히는 고등학교를 탈출, 대한민국 중․고등학생의 고뇌와 상처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자전적 에세이, 『네 멋대로 해라』로 열아홉에 데뷔했으며, 그 뒤로도 몇 권의 책을 펴내, 이제 글쓰기 경력 10년차가 다 된 ‘오래된 신진 작가’다. 또한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 최연소로 합격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고, 『씨네21』 『T매거진』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관한 톡톡 튀는 에세이를 실어 그의 글을 탐독하는 ‘팬’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십대 때부터 글을 쓰고 영화 공부를 하던 ‘현진이’의 소식이 궁금했던 독자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원생 겸 회사원이 된 ‘김현진 씨’는 독자들의 예상을 살짝 뛰어넘어, 오토바이를 끌고 ‘『시사저널』 사태’로 장기 농성을 하던 현 『시사IN』의 기자들을 찾아간 일을 필두로, 2008년 한 해에는 더욱 많은 시간을 ‘현장’과 ‘길 위’에서 보내는 경험을 한다. 열기로 가득했던 광화문, 기나긴 단식농성을 벌인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옥상 컨테이너, KTX 여승무원들이 올라가 있던 고층 철탑 들이 바로 그곳이다. 이 길과 현장에 참여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하고 솔직한 글들 역시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나는 머리에 든 것도 없고 좌가 뭔지 우가 뭔지도 알 수 없고 계급투쟁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지금의 세상은 있는 놈 편, 없는 놈 편으로 갈리는구나, 하고 느끼기만 한다. 지금 ‘느낀다’라고 썼듯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기분’뿐이다. 나는 어떤 주의자가 될 만큼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어떤 주의자가 못 되지만, 다만 굳이 무슨 주의를 붙인다면 ‘내기분주의자’다. 내 기분이 나쁘면 일단 나쁜 것이니, 뭔가 수상하다, 냄새가 난다, 고민해보자, 보통 이 과정을 밟아 나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내 기분 따라 진짜 화내도 되는 건지 어떤지 내가 가진 정체성의 레이더를 모조리 활용해서 알아내야만 한다. 미혼 여성, 이십대, 지방 출신, 철거민, 도시빈민, ‘각종학교’ 출신, 삼류 회사 직원, 요식업계 비정규 노동자…… 머리에 든 게 없으니 이런 것들을 죄다 활용해서 후벼 파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면 다음 순간 바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그 기록이다. 크거나 소소한 일들에 일일이 울거나 화를 낸, 그 기록들. (「나가며」, 301-302쪽)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다수가 영화나 드라마에 관해 쓴 에세이와 시사칼럼이다. 영화와 드라마에 관한 글들은 본격 비평이라기보다는 저자의 개인적 체험이 깊이 투사된, ‘뜨거운 산문’에 가깝다. 시사칼럼 역시 통상적인 시사칼럼과 달리 ‘생활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글들로, 그 온도가 적잖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성격의 글들이 나온 배경에는 ‘이십대, 여성, (비정규직) 회사원, 재개발지역 세입자, 고학생’이라는, 저자의 다양한 정체성이 놓여 있다. 그 원재료에서 뽑아낸 씨줄과 날줄을 재바르고 깔끔하게 엮어낸 글솜씨 덕에 그의 글들은 단숨에 읽힌다.
나 그렇게 돈 벌면서 별로 볼 거 없는 회사 3년 다녔지만, 3년 동안 는 거라고는 회식 때 삼겹살 딱 두 번만 뒤집고 인원에 맞게 잘 돌아가게 자르는 재주밖에 없습디다. 요새 결혼 안[못]하고 돈 없는 여자들은 만인의 구박덩어리인 것 같애. 다 우리 탓이라잖아. 애 안 낳는다고 여자들이 다 이기적이라서 그렇다고 하지. 누구는 결혼을 하기 싫어서 안 하나, 애를 낳고 싶어도 남자가 있길 하나. 골드미스들이야 자기 가꾸면서 화려하게 살아도 사실 세상의 태반 넘게 합금미스 아니에요? (「영애 씨에게 보내는 편지」, 14쪽)
시대가 더 그렇다. 남자건 여자건 내가 지금 가진 ‘스펙’으로, 내가 가진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을 고르려고 하는 시대. 나 가진 것 최대한 활용해서 그나마 제일 근사한 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전략적으로 조건검색 정렬을 행하는 게 손해 안 보고 행복해지는 길로 통하는 시대에 바보 병신 반푼이처럼 무조건 사랑을 향해 달리는 서글프고 사랑스러운 바보, 이 후진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 여자가 우리 안의 바보 멍청이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마츠코」, 54-55쪽)
속으로 외웠다. 괘앤~찮타. 밥이면 됐지. 비싼 반찬 못 먹어도 된다. 밥만 먹어도 사람은 산다. 커피 못 마셔도 안 죽는다. 30년 된 다세대 셋방 살아도 안 죽는다. 아직 젊은데 경사 급한 산동네 좀 올라간다고 안 죽는다. 비싼 밥 먹는다고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다. 드럼 세탁기에 돌린다고 옷에 금칠 되는 거 아니다. 명품 화장품 바른다고 갑자기 절세미인 될 것도 아니고, 프리미엄 진 입는다고 순식간에 제시카 알바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깨 펴고, 괘앤~찮타. (「마, 괘앤~찮다, 밥만 먹으면!, 83쪽)
88만원 세대여, 꿈이라도 꾸어보자
몇 년 전부터 크게 회자된 ‘88만원 세대’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의 이십대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듯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을, 실업이라는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껴안은 채 사회나 공동체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버르장머리’ 없고 외모만 가꾸거나 사치하기 좋아하는 존재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이십대 당사자인 저자는 동료들을 두고 “지금 이십대의 가장 큰 불행은, 생색낼 거리가 없는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히 싸울 대상이 없는 시대, 다만 물신의 시대, 무너뜨리려 해도 형체 없이 다시 일어나서 덤비는 모래와 싸워야 하는 시대, 무언가 소리 내어 외치면 촌스러워 보인다고 ‘쿨(cool)’이 손가락질하며 끊임없이 청춘의 뜨거운 체온을 얼리려드는 시대, 안개와 싸워야 하므로 헛발질만 하다가 제풀에 넘어지는 세대”(본문 146쪽)라고 묘사한다. 이런 이십대 동료들에게 그가 던지는 제안은 따뜻하면서도 따끔하다.
어쩌면 오늘의 88만원 세대는 재테크에 미치고 가난한 아빠가 되지 않으려 벌벌 떨다가 꿈이라는 것에는 손 하나 안 대고 마치 가져본 적도 없는 것처럼 완전히 새것의, 미개봉 상태로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어 버린 최초의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슬프고 참담한 일이다. 눈 깜짝할 사이 그때가 오기 전에, 아무것도 확실하게 손에 쥔 것이 없는 지금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자. 그 대책 없는 꿈은 가소로워 보일 정도로 연약한 힘일지언정,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생생한 동력이기도 하다. 세월 더 가기 전에, 제발 꿈을 꾸자. 꿈이라도 꾸어보자, 88만원 세대! (「친구들아, 꿈이라도 꾸어보자」, 149쪽)
모든 노동자는 하나라는 말을 이 철문[기륭전자를 가리킴-편집자] 앞에 와서야 알았다. 기륭 여성 노동자들, 나아가서 890만 비정규직이 흘린 눈물의 값, 피의 값을 도대체 어쩔 셈인가. 비정규직을, 핍박받는 여성 노동자들을 동정해서 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기륭이 쓰러지면 다음은 우리 차례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가 싸우지 않는 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우리가 기륭이고, 기륭이 우리다. 내 일뿐만 아니라 남 일에도 기꺼이 분노하는 것이 진짜 진보다. 지금 기륭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들이 당신을, 나를 부른다.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279-280쪽)
온몸으로 MB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이 용감하고 솔직한 이십대 에세이스트의 발랄하고도 가슴 찡한 글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어쩌면 자그마한 용기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홀로 마시는 술은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미치도록 외로운 소녀들은 삐뚤어진다. 소년들이 형들과 어깨를 걸고 밤거리를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걷는 동안, 소녀들은 홀로 방에서 취하고 고독은 깊어간다. 소년들은 형이 사주는 술을 마시고 어른이 되어 한 사람의 형이 되면 다른 소년들에게 술을 사주는 유구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소녀들은 오빠들이 술 마시는 옆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있거나 제 방에서 취해 있다.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언니들이 소녀들에게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소녀들이 자라나서 다른 소녀들에게 밥 사주고 술 사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순댓국집 마루에 앉아 생각했다. (…) 빽빽거리면서 에이전시의 발전이 어쩌고 떠드는 제니스를 보면서 늘 생각한다. 아, 많이 벌어야겠다고. 소녀들에게 더 밥 사주고 술 사주도록 가열차게 벌어야겠다. 많이 마시고 많이 먹어라, 소녀들아. 그래서 무럭무럭 자라라. 언니는 열심히 벌겠다. (「언니들이 사주는 술」, 77-78쪽)
저자소개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