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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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국외자, 열외자, 무리에서 소외된 자를 일컬어 ‘아웃사이더’라 한다. 한데 우리 정치판에선 이 아웃사이더란 개념이 기묘하게 비틀린 모양새로 나타난다.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 위치에 올라 있으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서 ‘핍박받는 소수자’인 양 사고하고 행동하며 분노까지 표출해대는 사람들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 발전과 정치 진보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그런 행태의 근저를 저자는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로 명명한다.
‘인사이더’의 위치를 점하고서도 ‘아웃사이더’ 심리로 ‘구 인사이더’를 탓하는 심리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지난 100여 년의 역사를 보면 ‘남 탓’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외세에 휘둘리던 구한말, 일제의 지배에 신음하던 일제 강점기, 강대국들의 입김으로 분단의 운명에 처해진 해방정국, 권력의 탄압 때문에 민주화가 저지되고 정치가 낙후된 독재정권 시절. 우리는 이처럼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오랜 역사를 겪은 탓에 어느덧 그 프레임과 패러다임에 갇히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갇힌 그 감옥의 이름이 바로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다. (본문 375쪽)
이런 아웃사이더 콤플렉스에 젖은 나머지, 탓할 외부의 적만 상대하느라 정작 자기교정 능력은 상실해버리는 현상의 대표적 사례로 저자는 ‘노무현 정권’을 지목한다. 왜? “노무현은 한국인의 아웃사이더 기질을 온몸에 농축한 인물”이며 “노 정권은 영남 정치권 아웃사이더와 호남 정치권 아웃사이더의 연합으로 결성”된 정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란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사례연구로서의 ‘노무현 정권기 총정리’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런 작업을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이에 대한 ‘하이에나식 비판’으로 치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한국호의 선장직을 물려받은 이명박 정권이 노 정권을 빼닮아가는 현실에서 이보다 더 좋은 반면교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코리안 드림’을 이루었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에도 능하다는 공통점이, 국민들과의 소통에는 귀 막은 밀어붙이기식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용할 경우 그 실패는 국가적 재앙으로 돌아오리란 점에서 말이다.
아웃사이더 콤플렉스가 야기하는 문제점들
아웃사이더 기질엔 진보성과 상통할 수 있는 등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넘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즉, (1) 통치 영역에선 독약이 될 수밖에 없는 ‘과장된 피해의식’(진보세력을 헷갈리게 해 오판하게 만든다.) (2) 스스로는 진정성의 발로일 뿐이라 믿는 ‘권모술수의 내재화’(스스로를 약자라 여기니, 이는 ‘만병통치용 면죄부’가 된다.) (3) 모든 걸 다 걸고 도박을 하는 ‘치킨게임의 상례화’(막중한 공적 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잃을 게 없다는 식의 ‘책임윤리 부재’를 드러낸다.)라는 문제점이 그것이다.
노무현과 유시민의 근본적인 문제이자 비극은 그들이 하늘땅처럼 달라진 위상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일반적인 국정 운영을 넘어서 대한민국 개조까지 꿈꾼 그들에게 대통령직은 시골 동네 이장의 지위처럼 낮고 무력하게만 여겨졌다. 그들은 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저항․고발 모드를 고수한 채 ‘싸가지 없는 말’을 그들의 유일한 무기로 삼아 투쟁했다. 일제 치하 독립투쟁가의 자세였다. (본문 19쪽)
지지자들에겐 ‘거룩한 순교자’인 양 열광을 불러오겠지만, 이로 인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과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게 비극이다. 기본적으로 남의 잘못에 대한 반사이익을 좇는 ‘반감․반작용․반동의 정치’가 유독 우리에게 자심한 까닭도, 바로 이러한 아웃사이더 콤플렉스가 ‘외부의 적’을 향해 증오 모드로 표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게 저자의 진단이다. 가뜩이나 정치가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판에 ‘신뢰 회복’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함에도, 증오 패러다임에 실린 노 정권은 “개혁과 진보를 앞세워 신뢰를 약화시키는 짓을 자주 저지르”는 죄악을 범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이 기존 질서의 변화를 열망하는 개혁진보 세력임은 물론이다. 노무현과 노 정권이란 아웃사이더가 개혁진보 세력이란 또다른 아웃사이더를 죽이는 주체가 되어버린 꼴인 것이다.
이번 총선 결과에 뚜렷이 드러난 아웃사이더 콤플렉스
지난 대선과 총선를 관통한 ‘노 정권 응징론’이란 대세와 최근의 이른바 ‘노간지’ 현상은 얼핏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두 선거 결과는 과연 우리 국민의 보수화․우경화를 증거하는 건가? 왜 통합민주당의 견제론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나? ‘뉴타운 논란’에서 보듯, 유권자들의 속물적 욕망이 그런 결과를 낳은 핵심적 진실인가? 이런 몇 가지 의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노간지? 시골 마을이 허용하는 개방성과 여유로움이 노무현의 서민적 풍모와 결합돼 이색적인 관심을 끈 결과일 뿐이다. 노무현이 퇴임 후 명륜동에 산다면 명륜동 관광으로 사람들이 미어터질까? 그건 김영삼의 상도동이나 김대중의 동교동으로 관광을 가는 것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난센스다. 앞으로 이명박 정권이 계속 사고 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더욱 많아지겠지만, 이는 끝없는 ‘반감 정치’의 증거로서 결코 반길 일만은 아니다.
견제론? 노무현과 통합민주당이 지긋지긋해서 내팽개친 유권자들인데, 무엇 때문에 그 반대편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한단 말인가? 지난 17대 총선에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대승을 안겨준 것이 그저 나라를 ‘탄핵’건으로 혼란스럽게 만든 자들이 괘씸해서 응징한 결과일 뿐이듯, 이번 18대 총선 역시 대선에 이어 여전히 계속된 ‘노무현 세력과 그 방조자들에 대한 응징’이었을 뿐이다. 이런 판에 견제론이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선 한마디 안 하고 남에 대해서만 말하는 아웃사이더 콤플렉스적 대응책이었으니, 유권자들의 응징 욕구 해소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우경화? 유권자가 응징하려는 세력이 기존 분류상 보수화․우경화의 반대편에 있었던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다음 선거에서 이명박과 한나라당에게 ‘응징’이 가해지면 그땐 또 예기치 못한 우리 국민의 ‘진보화․좌경화’라고 말한 텐가? 사실 이건 좌/우의 문제도 진보/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권은 여든 야든 모두 다 국민 뜯어먹는 집단일 뿐이라고 여기는 유권자들의 ‘좌절’이 핵심이다.
뉴타운? 뉴타운 때문에 서울 시민이 한나라당으로 돌아섰다고 보기에는 뉴타운과 전혀 무관한 서울 시민의 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언제는 유권자에게 탐욕과 욕망이 없었던가? 이보다는 반감과 반작용이 모든 걸 지배한 ‘좌절 신드롬’의 막나간 투표행위로 봐야 한다. 중요한 건 드러난 행태가 아니라 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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