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키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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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2005년부터 2007년 초까지 『한겨레21』에 「스포츠 일러스트」란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44편의 스포츠 칼럼을 책으로 묶었다. 각각의 글 뒤에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이란 짤막한 글이 추가되어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거나 저자의 심경 변화를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책은 문화부 기자로 있는 저자가 스포츠에 투영된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단면들을 포착하고 그렇게 포착된 현상에 대한 느낌을 유쾌하고 말랑말랑한 어투로 풀어나가는, 개성 넘치는 칼럼 모음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스포츠 신문이나 여타의 관련 매체에 경기 기록이나 승패에 대한 분석, 선수들의 신상 등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실리는 칼럼들과는 다른 독특한 차별점을 갖는다. 이와 더불어 스포츠를 통해 나타나는 한국 사회의 과도한 애국주의, 즉 “태극기에 갇힌 스포츠”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엿볼 수 있다.
어차피 스포츠 보기에 중독된 인생, 태극마크에 대한 집착은 되도록 버리고 스포츠를 보면서 인생도 느끼고 세상도 생각하자는 뜻이 결과적으로 「스포츠 일러스트」를 모아 놓은 책에 담겼다. 생각하는 스포츠, 그것은 선수들만의 전유물이 아닐지 모른다. 그리하여 스포츠를 보면서 느꼈던 아저씨의 잡생각을 쓰다 보니 스포츠중계에, 스포츠뉴스에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얘기의 묶음이 되었다. ―머리말 중
물론 저자 개인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 좋아하는 선수에 대해 일방적인 응원을 펼치는 글도 읽어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좋아하는 선수들이 사회적으로나 스포츠계에서나 소외받아온 성소수자, 흑인선수, 앙골라 여자 핸드볼팀 등이란 사실은 개인적 취향의 개입 유무를 넘어선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소외받는 팀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해온 아저씨의 스포츠 중계이자 검은 활자로 부르는 마이너리티 응원가”이다.
약자들에게 바치는 응원가
한국 여자 핸드볼팀은 2003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보여준 덴마크와의 경기는 많은 스포츠팬들을 울렸다. 이때 뛰고 있었던 선수들이 임오경, 오성옥, 오영란 같은 선수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가 서른이 넘은 노장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에이스이자 세계적인 골게터였던 이상은 선수는 소속팀조차 없는 무적(無籍) 선수였다. 이런 선수들이 모여서 보여주었던 올림픽 결승전의 투혼은, 비록 은메달이었지만 긴 여운으로 남았다. 임순례 감독은 그날의 경기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란 제목으로 만들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 경기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있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선수들의 일치단결, 백전노장들의 희생과 팔팔한 신예들의 헌신, 모든 것이 풍족한 상대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우리, 생계를 위해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할 절박한 사연,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함성을 토하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승부,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패배가 있었다. 그날의 승부는 패배로 완성됐다. ―「오래 뛰는 ‘언니’들이 좋다」
저자에게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을 연상시킨다는 앙골라 여자 핸드볼팀은 2005년 열린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대회에서 한국과 맞붙었다. 결과는 한국의 역전승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이 아니라 ‘역전’이라고 말한다. 앙골라는 이날 경기에서 한국에게 “47분을 이기고 3분을 졌다.”
당연히 경기를 보다가 곤혹스러워졌다. 한국을 응원해야 하는데, 앙골라도 응원하고 싶어졌다. 앙골라 선수들의 앙다문 입술에서 굳은 결의가 묻어났다. 그것은 한국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아테네 올림픽 결승에서 올림픽 2연패의 덴마크를 이기고 싶어할 때의 표정이었다. ―「한국을 혼쭐낸 앙골라 파이팅!」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에 “나는 앙골라의 팬이다”라고 선언하듯 말한다. “세계는 넓고, 응원할 팀은 많다. 지금, 여기 ‘메이드 인 코리아’만을 응원하는 시절이 하수상하다. 앙골라 파이팅!” 이런 응원이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 선수가 나오는 경기만 봐야 하고 한국 선수가 이기기만을 바라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지라도 감동적인 경기에서 오는 희열을 막지는 못한다.
이밖에도 저자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일들은 많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역도의 장미란은 은메달을 따고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국내 스포츠계에서 거의 돌보지 않는 남자 하키 선수들(“국제대회 엔트리는 18명이지만, 태릉선수촌의 하키팀 할당은 16명이다”)은 매 대회마다 드라마 같은 승부를 펼쳤고, 배구선수 후인정과 현대캐피탈 감독 김호철은 만년 2위의 서러움을 딛고 우승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20대의 금메달보다 멋진 노장의 투혼
저자가 한국 여자 핸드볼팀을 말하면서 “오래 뛰는 ‘언니’들이 좋다”고 밝히듯 30살이 넘고 40살이 거의 다 되어서도 국제적인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찾아볼 수 있다. 한 번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를 선언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미녀 가드’ 전주원은 서른 중반의 아줌마이고, 정선민은 서른 줄의 나이에 미국 여자 프로농구(WNBA)에 도전하기도 했다.
쇼트트랙의 김동성과 전이경은 올림픽 2관왕 후 22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뛰었던 리자준은 31살에도 계속 선수로 뛰었고 데라오 사토루도 30살의 나이로 도전을 계속했다.
리자준은 아직 배가 고프다. 다섯 개의 올림픽 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은 아직 못 땄다. 데라오는 영원한 ‘B파이널’ 선수다. 해설자 김동성은 데라오에 대해 “별 성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야박한 말이었다. 서른 살의 도전자는 스무 살의 금메달 못지않게 훌륭하다. ―「안현수도 공식 따라 은퇴?」
더불어 저자는 “22살에 올림픽 4관왕의 업적을 이루고 은퇴한 전이경은 훌륭한 선수지만, 29살에도 여전히 정상급 현역인 라다노바는 위대한 선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일찍 은퇴한 것이 못할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스포츠팬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아쉬울 만한 대목이다. 이런 저자의 소망은 소박하다. “20살의 안현수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도 멋있지만, 30살의 안현수가 동메달을 따는 모습은 더욱 멋있지 않을까. 아니 서른까지는 아니라도, 부디 다음 올림픽에서만은 진선유, 변천사, 최은경, 안현수, 이호석, 젊은 그대들의 도전을 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테니스계에서는 앤드리 애거시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를 들 수 있다. 지난 2006년 US오픈을 끝으로 코트를 떠난 애거시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선수생활 동안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한 기록)’을 달성한 5명 중 1명이었고, 역대 최고령 세계 1위였으며 35살에도 세계 톱10을 유지한 선수였다. 한때의 좌절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노장’ 앤드리 애거시는 “가장 많이 우승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선수였다.” 마르티나 힝기스의 ‘마르티나’는 나브라틸로바에게서 왔다. 샤라포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아버지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한 것도 그였다. 나브라틸로바도 2006년 US오픈을 끝으로 무려 50살이란 나이에 코트를 떠났다. 1956년 체코 태생인 그는 1981년 미국 영주권을 얻으면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레즈비언다운 레즈비언이었다. 동물권리운동에 앞장서는 채식인이었고, 동성애자인권운동에도 기여했다. 동성애자 건강을 위해서 활동하는 모임에 기꺼이 자신의 명성을 빌려주었다. 마흔 넘어서 코트에 복귀한 뒤에는 테니스를 즐기고, 인생도 즐기면서 멋지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굿바이 나브라틸로바」
이렇듯 노장의 투혼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넉넉함과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팬은 가끔씩 서글프다
저자는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프랑스인으로 뽑히는 지단과 생년월일이 같다. “4년마다 월드컵을 통해 지단의 이마가 점점 넓어지고, 이마의 주름이 차츰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술회하는 저자는 지단이 은퇴를 선언했을 때 자신도 기자 생활을 은퇴하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뉴캐슬에서 뛰었던 앨런 시어러는 2006년 뉴캐슬 클럽 사상 최고 득점 기록인 201골을 고향팀에 바치고 은퇴 의사를 밝혔다. 프랑스 이주민의 상징인 지단과 영국 노동계급의 대표선수였던 시어러의 은퇴는 그들을 사랑했던 팬에게 서글픔을 안겨준다. 그래서 저자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팬은 스타와 함께 늙어가지만, 스타처럼 은퇴할 자유는 없다. 쳇!”
저자는 자신을 ‘농구대잔치 키드’ ‘장충체육관 키드’ 등으로 자신을 부르며 1980년대부터 식지 않고 이어져 온 자신의 국내외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보는’ 스포츠가 아닌 ‘하는’ 스포츠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지만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다. 이렇게 보는 스포츠도 즐거웠지만, 하는 스포츠의 즐거움을 따르지는 못한다. 서른이 넘어서 비로소 하는 스포츠의 즐거움을 알았다. (…) 지난 3년 동안 달린 거리가 앞서 30년 동안 달린 거리의 3배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의무로 시작한 운동이 어느새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심지어 중독 증세도 보이는데, 태엽을 감아야 시계가 움직이듯 1시간 운동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기 힘들다. ―「대한민국 10%, 나의 스포츠 이야기」
『스포츠 키드의 추억』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는 독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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