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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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초판 발간 이후 쇄를 거듭하며 한국어를 좀더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독자들을 사로잡온 『감염된 언어』의 개정판이 나왔다. 고종석은 개정판 서문에서 "언어를 사회적 맥락에서 들여다보고자 하는 욕망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감염된 언어』에 내재된 그의 주의주장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순수한 한국어에 대한 전체주의적 시각이나 쇼비니즘적 발상은 아직도 한국어를 자유로운 언어로서 숨 쉬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개인주의와 열린 자유주의'로 요약해볼 수 있는 고종석의 시선은 한국어를 사유하는 방식을 비롯, 그것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번 개정판에는 「섞임과 스밈-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이란 글 한 편이 더해져 고종석이 한국어를 사유하는 방식을 좀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글 한 편을 더해 다시 출간된 『감염된 언어』는 한국어에 애정을 갖고 이를 좀더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독자들에게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것이다.
순수한 언어란 없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고종석이 한국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진지하고도 자유롭게 성찰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 동안 여러 매체에 글을 발표하면서 한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온 고종석은 모든 언어는 혼혈이며, 순수한 언어는 없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순수한 국어의 주장은 항상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어난 것처럼,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고종석은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인류 문화의 역사는 곧 감염의 역사이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임을 증명한다. 제도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한국어에 대한 논쟁들과 상당히 다른 고종석의 이러한 의견들은 한국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부드러운 개인주의, 열린 자유주의
고종석이 영어공용화 논쟁이나 한자 혼용, 외국어 표기법 같은 사안을 다루면서 갖는 기본적인 입장은 언제나 '부드러운 개인주의와 열린 자유주의'의 모범을 보여준다. 즉 그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쉬고, 또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낄' 뿐 아니라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고종석이 보여주는 언어관은 "개인으로 돌아가라"라고 선동하고 "『조선일보』의 야만"을 비판하면서 보여준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로서의 태도와 따로 놓을 수 없다. 그 태도란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럽지 않으며,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에 다름아니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이 책의 주요내용
*서툰 사랑의 고백 ― 서문을 대신하여
필자는 '외국어로 글쓰기'에 대한 꿈을 꾸던 시절, 여러 나라의 언어들을 섭렵한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 이 글에서 한 사회가 집적한 지식과 정보의 곳간인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필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민족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모국어를 사랑하는 것이 민족주의자의 한 징표라면 민족주의의 인력권 바깥에 있지 못하며,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서문에 붙이는 군말
모든 순결주의가 그렇듯 언어순결주의도 파시즘에 정서의 탯줄을 대고 있다고 말하는 필자는, 한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며, 둘째, 외래어가 뒤섞인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래어나 일본제 한자어, 북한의 이질적 언어 등이 뒤섞여 한국어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고 말한다.
*감염된 언어, 감염된 문학 ―한국어 문학을 바라보는 한 시각
요즘 대두되고 있는 한국 문학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분석의 글이다. 문학의 정의에서 언어는 본질적이기 때문에 한국 문학이란 한국어로 이뤄진 문학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필자는 여기에는 '한글 문학'만이 아니라 향찰이나 이두, 한문으로 쓰인 것들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8세기에 쓰인 향가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듯이, 8세기의 한국인이 20세기의 한국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젠가는 한국인이 외국어에 담을 수도 있을 '한국어 문학'을, 고대인이 그 낯선 한국어에 담았던 '한국어 문학'만큼이나 소중하게, 또는 적어도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섞임과 스밈 ―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
'순수한 한국어'만을 고집하는 언어순혈주의의 속살이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한국어가 그 내부에 서로 다른 방언적 이물질들을 감싸 안고 있는 잡탕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한국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고 말한다. 고종석에게 순수한 한국어, 그 순수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어를 버리고 소통 불능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
민족어에 대해 사람들이 취하는 세 가지 태도를 역사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 '순수한 독일어'를 확립하고자 했던 독일적 폐쇄형, 둘째 고전어와 인접국의 언어를 너그럽게 받아들인 영국적 개방형, 셋째 개방주의와 순수주의를 오락가락한 일본적 양향형이 그것이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듯, 영국적 개방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전제 아래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벌어진 각 논자들에 대해 심도 깊은 논평을 보여주고 있다. 한영우 교수, 이윤기 씨의 '정서적 반응'을 통해 우리 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민족주의라는 밧줄의 실체를 보고, 복거일의 민족주의 비판까지 옹호할 수 없었던 정과리의 오독(誤讀)을 비판한다. 특히 『창작과 비평』 최원식 주간에 대해서는 "'전통'과 '새로운 모델'을 내세우며 허세와 궤변을 일삼는다"며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필자는 복거일처럼 가까운 장래에 민족어가 '박물관 언어'화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는 (서구의 라틴어와 동아시아의 한문이 그랬듯이) 민족어와 영어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되는 '이중언어 사회'가 될 것으로 예견한다. 그 먼 미래에는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동서 인류문화를 빨아들인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 ― 한자에 대한 단상
필자는 이 글에서 한글은 음소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음절합자식(音節合字式)'으로 운용되고 있어서 한글 속에 한자가 끼여들 가능성이 높다고 전제한 다음, 한자 혼용에 대한 유혹은 이렇게 한글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모범적 서기체계는 한글 전용이므로 공적인 출판물, 특히 교과서에는 한글 전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필자는 또한 한문 표기가 익숙한 세대는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한글 전용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말 어휘의 반 이상은 한자어이고, 그중 많은 단어가 한자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으므로 한자교육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필자는 이 글의 뒷부분에 한자로 쓰인 일본의 인명·지명과 중국의 인명·지명에 관해서도 날카로운 분석을 덧붙이고 있다.
*佛蘭西, 法蘭西, 프랑스
외래어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에 대한 필자 특유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글이다. 19세기 이후 급격한 외래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논란이 끝이지 않는 외래어 표기에 관한 논쟁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고 있지만, 최근 일부 '전문가'를 중심으로 원음주의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모든 외국어의 '원음'의 범위를 정할 수 없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지 밝히고 있다.
*〈누이제가〉에 대한 객담
흔히 〈제망매가〉로 알려진 향가에 대한 필자의 감상이다. 1956년 평양에서 출간된 홍기문의 『향가 해석』에 실린 이 시의 제목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죽음과 마주선 노래의 아름다움을 필자 특유의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서경별곡〉의 변죽
'평양'이라는 이름의 이미지와 '서경'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를 비교하면서, 서경을 배경으로 삼은 노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서경별곡〉의 감상을 적은 글이다. 이별 앞에서 격렬하게 토해내는 감정을 노래한 이 고려 속요가 현재의 삶을 붙잡는 자의 아름다운 절창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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