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의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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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사회는 격동 속에 휩싸였다.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대지각변동을 겪으면서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었다. 그런 만큼 서구사회의 패러다임을 그 저변에서 이끈 지성들의 움직임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서구 지성사 3부작’은 바로 그 뜨거운 시대의 지적 전통의 거대한 뿌리를 캐는 방대한 작업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전후를 다룬 연구 성과 가운데 현재까지 서구 지성계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칼 야스퍼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석가, 공자 등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기원전 500년을 전후한 시기를 이른바 축시대軸時代, die Achsenzeit라고 일컬으며 인간 자각의 대전환기로 보았다. 이와 유사하게 ‘서구 지성사 3부작’의 저자 H. 스튜어트 휴즈는 3부작에서 다루고 있는 최초 시점인 1890년대부터 이후 40여 년간을 인류 역사상 가장 새롭고 창조적인 전환의 시기로 보고 있다. 실제로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들을 정립한 사상가들, 예를 들어 프로이트, 베버, 마르크스, 크로체, 뒤르켐, 베르그송, 파레토, 마이네케, 융, 딜타이, 슈펭글러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다. 당시는 세기말과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변의 흐름 속에 놓여 있었고, 당대 지성들은 이전까지의 사상적 틀 속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설명해내기 힘들다는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까지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지적 모험을 감행했다.
창조적 전환의 시기를 지나고 나서 서구 사회는 다시 한 번 격랑에 휩쓸린다. 바로 전체주의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시대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이 두번째 시기 동안 냉혹한 현실 문제에 직면한 지성들이 어떻게 맞서 싸워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지성사의 대변혁이 만들어낸 흐름을 총괄한다. 저자는 이 시기의 지성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하나는 정치경제적으로 패배한 프랑스의 지성들이 절망적인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싸워 나갔던 지적 여정들이다. 그 대표자들로는 페브르와 블로크를 비롯해 마리탱, 마르셀, 베르나노스, 생-텍쥐페리, 앙드레 말로,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등이 있다. 다른 그룹은 이른바 망명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국내 망명이나 해외 망명의 형태로 유배를 떠나 당대 현실 문제에 천착하며 각각 전혀 다른 사상적 업적을 남긴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 만하임, 노이만, 아렌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인 하르트만과 에릭슨 등이 그들이다.
이로써 저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시대 이후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준 두 세대―1890년부터 1965년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특징적인 것은, 서구에서 ‘지성사’ 서술에 관한 한 최고의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는 저자가 택한 방식이 일반적인 ‘사상사’ 개념과 다른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이미 형성된 사상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의 형성과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자는 3부작을 통해 특정 사회적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이 지성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탐구하고, 이 방식들을 통해 지성의 전체적 움직임을 개관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3부작은 일반적인 사상사와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일반 사상사가 이미 익어서 떨어진 과일을 주워 모아 분류하는 작업이라면, 3부작은 과일이 나무에 하나하나 열리는 과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상사를 보던 안목으로 본다면, 이 책이 전기적 요소를 중요시하고 그 시대의 지성을 움직인 배경에 중점을 둔 것에 낯설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가 바로 생동하는 지성의 움직임을 파악하고자 한 점에 있었음을 이해한다면, 대변혁의 시대를 망라하며 ‘통섭의 지식인’으로서 저자가 개괄해낸 이 책의 생동감에서 그 시대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파시즘과 냉전의 시대를 살아간 지성들
1930년대 초 서구 지성은 히틀러의 집권 및 파시즘의 융성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지식인들의 망명’이 시작되었다. 휴즈는 1930~1960년대의 세대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문화적 우월감과 시대적 절망이 혼재해 있던 프랑스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파시즘의 대두로 인해 유럽대륙을 떠나 영국이나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국내 망명의 형태로 은거한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서구지성사 3부작’의 다른 책 『막다른 길』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후자가 바로 이 책에서 탐색되고 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등장으로 인해 이탈리아와 중부유럽의 지식인들이 고향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책은 선구자적 문학가들이었던 헤세와 만,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논리실증주의 전통, 보르게세ㆍ만하임ㆍ프롬ㆍ살베미니ㆍ노이만ㆍ아렌트 등의 파시즘 비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ㆍ마르쿠제 등의 대중사회 비판,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 전통 그리고 틸리히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중심문제와 맞서 고뇌한 지성의 거대한 흐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휴즈는 망명자들 가운데 지적으로 가장 탁월한 예외라 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사회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논리실증주의’와 ‘현상학 및 실존주의’로 분리되어 있던 사유양식들을 하나의 지적 세계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전망을 제공했다고 본다.
파시즘 비판에서는,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직접적인 도전으로서 파시즘에 대해 당대 망명 지성들이 파시즘의 기원을 심리적 차원, 계층의 차원 등에서 철저히 분석했으며, 그것과 자본주의의 관계도 문제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파시즘 연구를 그들의 망명지인 영미 세계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대중사회 비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대중사회 비판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대변되는 ‘비판이론’을 중심으로, 헤겔의 방법을 사용해서 부정의 과정을 부단히 전개시켜 나가는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에 도달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이 비판이론을 통해서 파시즘을 자유민주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극단적인 모습―즉, 비합리적 지배의 경향―으로 파악하면서 미국 사회 자체 내에도 잠재적인 파시즘 성향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휴즈는 에릭슨과 하르트만 등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계승되어왔는지를 공정하게 기술하고, 파시즘의 종식 후 냉전의 도래로 촉발된 매카시즘의 폭풍 속에서 망명 지성들이 대응한 방식과 영향 등을 정리해낸다.
망명 지성들이 모두 일관되고 힘 있는 행보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과거의 이념적 지향성을 포기 또는 계속 변형시켜나감으로써 그들의 주장의 요체가 무엇인지 모호하게 된 사람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정권의 변화에 비틀거리고 망명으로 좌절하면서 냉전시대에까지 도달한 이 세대의 인물들 중 몇몇은 다시 한 번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지성들은 한 세대의 사회적 조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돌파하려고 분투했던 지성의 흐름을 보여줌으로써 당대를 더욱 현실감 있게 조명하게 만든다. 저자는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모습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그냥 흘려버리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 영광과 오욕, 찬사와 비난이 교차하는 가운데 있었던 그들의 사상을 그 자체로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저자소개
옮긴이 김창희: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및 정치부 기자, 독일특파원, 기획취재팀장, 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 이후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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