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묻는다(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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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그 두 개의 시선 안에서 인간을 묻는다
이 책은 국내에서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폴란드 태생의 영국 과학자 제이콥 브로노프스키(1908~1974)의 저서이다.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수학, 통계학, 군사 무기 개발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저자는 1945년 원자폭탄의 효력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나가사키를 방문하던 도중 그곳의 참혹한 실상을 목격한 뒤 인간을 배제시킨 과학의 문제를 깨닫고 ‘과학과 인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역자인 김용준은 과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씨알 함석헌 선생을 만나 한국전쟁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을 목격하며 인간과 세계를 배웠고 “과학 없는 종교는 미신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흉기”라는 믿음을 견지해온 원로 과학자이다.
과학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그것을 담는 그릇인 인간의 언어를 강조해서 설명하는 이 책 역시 저자의 그러한 충격과 변화된 인식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과 예술을 통해 얻게 되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째서 남들과 다른가?
인간은 누구나 남들과 다른 존재이기를 원한다. 내가 취하는 어떤 행동이 남들의 눈에 독특한 것으로 비춰지고 내가 가진 습관이나 생각이 남들과 다를 때,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독자적 특성을 지닌 하나의 자아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개성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별나고 개성적인 표현 방식도 그 자체로서 일관성을 지니게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으로 굳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토록 확신하고 싶어하는 자아의 정체성은 어떻게 인식되고 체계화되는 것일까?
이 책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저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얻어지는 경험이 인간의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얻게 되는 두 가지 양태의 지식에 있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자연을 통해 얻게 되는 과학적 지식과 인간 감정의 총체인 예술 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자아에 관한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기 정체성은 어떤 순간에, 또는 어떤 독특함에 의해 한순간에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변화무쌍한 자연을 경험하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과 공감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확대되며 변화를 겪는다.
과학과 예술, 나란히 서서 인간을 바라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과학과 예술 두 분야는 우리에게 서로 전혀 다른 것, 또는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분야들로 인식되어왔다. 특히 과학이란 예술과는 판이한 절대적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며, 어떤 이론을 확립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엄격한 체계와 기준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과학이란 예술에게 낯선 존재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과학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과학적 발견까지 이르는 일련의 연구 과정이다. 과학이 낯설고 어려운 분야로 인식되어온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연구 과정은 보지 않고 어떤 결과물로서만 보려 하기 때문이다. 다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과학은 결정의 시기에 도달했을 때 남아 있는 모호한 가설과 결과들을 제거해버린다는 데 있을 뿐이다.
과학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이다. 우리가 실제로 목격하게 되는 자연 현상들을 과학은 그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단어들은 동일한 현상 속에서 또 다른 결과가 목격되었을 때 그것을 검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듯 과학은 과학자의 사고와 상상력이라는 작용이 결합된 결과물로서 예술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과 동일한 범주 안에 놓이게 된다.
반면 예술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전형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그 어떤 윤리적 판단도 거부한 채 자아에 관한 지식을 전달한다. 예술은 인간에게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결국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확정성이나 좋고 나쁨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해낸 인간과 인간 자아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과학과 예술은 인간에게 각각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해준다. 이 책에서는 서로 등 돌리고 있던 과학과 예술이 마주보고, 다시 한곳으로 동일한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이 닿는 지점에는 모든 질문들의 근원이자 귀착지인 ‘인간’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인간은 자연과 인간을 경험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게 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일찍이 고대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물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거대한 정신이 버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과학자이자 철학자였고 시인이자 예술가였다. 저자는 과학과 예술의 차이란 단지 그 표현의 방식에 있을 뿐이며 상상력이라는 공통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이미지로 구체화시키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켜준다. 이때 우리는 자연과 자아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애쓰는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의 메커니즘에 따라 기능을 수행하는 육체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단일신경세포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 뇌에 명령을 하달하는 체계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비극적 감정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예술 두 분야를 거침없이 오가면서 인간의 행동과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과학과 예술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가치들을 인정하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오늘날의 불편한 인식에도 맞물려 있다. 과학과 예술의 경계가 편견 없이 허물어진 행간에서 인간 정체성의 위기와 그에 대한 통찰력 있는 철학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지닌 또 다른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 후기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책은 80년대 초반 이미 출간된 적이 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과학자나 인문학자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못했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출간되는 이 책이 가진 의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과학이란 개념이 이전 시대보다 독자 대중에게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현대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마저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정체성을 찾기 위한 좀더 확장된 시도로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저자소개
옮긴이 김용준: 1927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대학교에서 유기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씨알 함석헌 선생을 만나 한국전쟁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의 격변기를 함께 거치면서 인간과 세계를 배웠다. 쓰거나 옮긴 책으로 『내가 본 함석헌』,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과학, 인간, 자유』,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 등이 있으며 현재 학술협의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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