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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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빈곤 문제가 이제 ‘절대빈곤’에서 나아가 ‘신빈곤’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현실은 어느 특정 국가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일’을 갖지 못한 것도, 노동 능력을 상실한 것도, 노숙자도 아닌 이들에게서 ‘살아갈 희망’을 거세시키고 있는 이 문제의 심각성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고된 노동에 몸을 바쳐도 그 질긴 빈곤의 굴레로부터 도대체가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죽어라 일해도 살 수가 없다는 것은 그 개인의 불성실이나 무능으로 돌려질 수 없는, 그 사회의 구조적인 근본문제를 반증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목숨 부지에 불과한 ‘절망지대’의 현실을, 최소한의 생계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고된 노동의 모순을 바로 그 밑바닥 삶의 눈높이로 샅샅이 파헤쳐본 작업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직접 빌딩 청소원, 병원 잡역부, 빵공장 노동자, 텔레마케터, 간병인 등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면서 보고 겪은 바를 상세히 전함과 동시에 저임금 노동으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들의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심층/탐사 보도’의 미덕을 값지게 성취해낸 한 모범이라 할 만하다.
‘경제 발전’과 ‘사회 정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빈곤층이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정당한 대가를 받을 만한 빈곤층’의 노동이 저평가되어 있는 현실은 ‘능력사회’니 ‘적자생존’이니 하는 개념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열심히 일해서 자립할 수 있다면 구태여 소득을 재분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오늘날 저임금 노동자는 동일한 노동에 대해 30년 전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이며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게 최저생계비를 지급한다는 목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국민적 결단을 내리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공정한 사회는 기회와 보상에 있어 모두 공정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정한 체제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현재의 불공정한 체제를 유지할 것이냐는 사회적 공감대를 요구하는 문제다. 여기에서 저자는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새로워진 (영국) 중산층 노동당 역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양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빈곤층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정책을 내놓지 못한 채 유권자들의 양심에만 의존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면 내 생활수준이 꾸준히 향상되는 것을 잠시 억제하고 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를 따라잡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다수의 유권자를 설득해야 하거늘 노동당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생활수준을 억제한다고 해서 실제로 이를 깎아내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앞으로 부유층의 소득 상승 속도를 늦추고 거품을 빼야 한다는 이야기다. 빠른 사회 발전은 가장 무능한 빈곤층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생각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현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야 한다.
노동의 공정한 가치와 보상의 균형을 찾아보자는 이러한 제안은 혁명적인 것도, 사회주의를 재건하자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소득 증대가 다른 한 사람의 소득 저하를 동반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며, 경제발전(성장)과 사회정의(분배)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음을 증명해 보인 토니 앳킨슨 교수(계량경제학)의 연구 성과를 빌어 경제 수익을 공정하게 공유할 경우 오히려 사회가 단결되고, 이는 경제발전에도 플러스로 작용한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339쪽) 그런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 역시 근거가 희박해진다.
영국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
저자는 빈곤층을 위해 내세운 이른바 복지정책이란 것들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정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을 책의 곳곳에서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영국 저임금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상은 때때로 우리의 현실과도 매우 흡사해 놀라움을 준다. 우리 복지제도의 상당 부분이 영국의 것을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만, 사실 영국은 유럽 국가 가운데서 정부의 사회복지비 지출 비율은 가장 낮고 빈곤층 비율은 가장 높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과 맞비교한다면 독자들은 이내 “그래도 우리보단 낫네!” 하는 소리를 뱉게 될 것이다.
영국의 현실을 다룬 이 책이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것은 무엇보다도 문제의 근본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초미의 과제로 닥쳐온 신빈곤 문제가 과연 어느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배태된 핵심적 사안들이 무엇인지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되리란 점이다. 여기에 이 책이 하나의 사례연구이자 반면교사로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리라 믿는다.
저자소개
옮긴이 이창신: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졸업. 옮긴 책으로는 『욕망의 식물학』『블루 골드』『고추, 그 맵디매운 황홀』『아이의 뇌를 읽으면 아이의 미래가 열린다』『스파이의 역사1』『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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