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천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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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은 ‘천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생산성이 발산되고 있는 순수한 변종의 특정한 형태이다. 유전에서 천재의 위치, 즉 세대를 거치는 동안 정신질환적-퇴행적 사건이 분명하게 보편적으로 현현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천재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재의 ‘병리학화’이고, 보다 쉽게 이해하자면 ‘천재와 광기의 결합’이다. 1930년대의 ‘병리학’은 좀 낯설지 몰라도, ‘천재와 광기’라는 공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천재, 천재를 만나다』의 저자 한스 노인치히는 이러한 공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1930년대의 ‘병리학’ 대신 미켈란젤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의 ‘창조력을 자극하는 경쟁심’에 무게중심을 둔다. “자연이 어떤 직업에서 우수한 인물의 잠을 깨울 때는 종종 그 인물을 혼자 두지 않고 동시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제2의 인물을 내보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자극하고 경쟁심을 통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천재와 천재의 만남에 주목한다고 해서 곧바로 ‘천재는 천재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천재가 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 천재를 보다 넓은 소통 및 사회적 여건 하에서 고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병리학’이 천재를 더욱더 어둠 속으로 가둬간다면, ‘창조적 경쟁심’은 천재를 점점 더 빛으로 끌어낸다.
일상적인 만남, 특별한 창조물
빛으로 끌려나온 천재들에 대한 첫인상은 어쩌면 실망스러움일지도 모른다. 천재들 간의 만남의 과정은 일반인들이 나누는 만남의 모양새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정이 있는가 하면 경쟁의식이 있고, 신중함이 있는가 하면 열정에 휩싸인 경솔함이 있고, 관용과 베풂이 있는가 하면 질투와 시기가 있고, 사랑이 있는가 하면 미움이 있다. 그리고 만남이 있었으니 당연히 헤어짐도 있다. 하지만 이렇듯 평범하게만 보이는 천재들의 만남에는 그래도 여전히 뭔가 특별한 것이 숨어 있다. 천재들의 만남에서 일어난 일들은 단 하나도 쓸모없이 새어나가는 법이 없다. 아무리 하찮은 감정도, 아니 심지어 아주 비열하고 치졸하게 보이는 감정들조차도, 천재의 가슴에서 박동치기 시작하면 어느새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값진 열매를 맺어놓는다.
창작의 슬럼프에 빠져 있던 괴테와 실러는, 평소 꺼려해오던 서로에게서 도움의 손길을 구한다. 그렇게 자극을 얻어, 괴테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파우스트』를 다시 시작하고 『빌헬름 마이스터』를 완성하며, 실러는 『발렌슈타인』으로 화답한다. 빅타 색빌웨스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던 버지니아 울프는, 색빌웨스트의 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 『올랜도』를 집필,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바그너에 열광했던 니체는, 그의 오페라에서 그리스 비극의 원형을 발견하고 이를 『비극의 탄생』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실망으로 변한 열광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바그너의 경우』 등의 작품 속에 결별을 새겨나간다. 많은 지성인들의 뮤즈로 일컬어지는 루 잘로메는, 굳게 닫혀 있던 자신의 마음을 릴케에게 열어 보이며 그가 시인이 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점점 더 현실적인 삶에서 유리되어가는 위대한 시인 앞에서 사랑은 체념을 머금은 채 묵묵히 우정의 시선만을 유지해나간다.
만남 혹은 자기와의 대화
천재들의 이런 만남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러한 만남이 곧 자기와의 대화라는 점이다. 앙드레 지드가 발레리, 클로델, 시므농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과 서신 교류를 가졌던 것도, 막스 프리슈와 뒤렌마트가 ‘작업동료’ 관계를 유지한 과정도, 또 그 결별 이유도, 사르트르와 카뮈가 끝내 메우지 못할 깊은 골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도, 심지어 아나이스 닌이 헨리 밀러에게 매혹되었던 것도, 결국 ‘자기와의 대화’라는 욕구에 기반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듯 끊임없이 동등한 수준의 대화를 욕구하면서도 또 끊임없이 고독을 지키려고 애쓰는, 즉 끊임없이 또다른 자기와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정 천재들의 만남이 간직한 비밀이자 천재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천재는 천재를 원하고, 그와 더불어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그 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찬란한 작품들이 잉태되는 것이다. 타인 속에서 발견한 또다른 자기와의 대화, 바로 이를 가능케 한 천재들의 교유 역정을 통해 독자들은 그 ‘찬란한 작품’에 다가가는 또다른 비밀 통로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옮긴이 장혜경: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독일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독일 하노버에서 잠시 공부했다. 번역서로 『사랑, 그 딜레마의 역사』 『오디세이3000』 『피의 문화사』 『소유와의 이별』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아담의 조상』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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