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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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에세이스트’ 그리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옹호자’. 저자 고종석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그리하여 늘상 그에게 따라붙는 말들이다.
전자는 뛰어난 문장가로서의 고종석을 지칭하는 것인데, “외솔의『우리말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새롭다. … 내 마음의 행로에서 국어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철거된 적은 없다”(서얼단상, 173쪽)는 언급에서도 보이듯 그의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이는 가히 ‘고종석식 문장’이라 이름할 만한 그만의 독특하고 단아한 문장을 낳게 했고,『감염된 언어』나「살균된 사회, 위생처리된 언어」와 같은 작업으로 표출되었다.
후자는 자칭 ‘서얼’이자 ‘회색인’이요 ‘오열분자’인 고종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압축해 보인 말인데, 좌우 이념의 스펙트럼에서는 “희미한 우(右)”이며 세속도시와 유토피아를 오가는 “스파이”인 그의 정체성을 일구어낸 두 기둥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애매한 중립적 관찰자로 자리매김한 채 끊임없는 회의의 잣대를 들이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두 권의 책『서얼단상』과『자유의 무늬』는 이 어정쩡한 중간자의 눈으로 본 세상 관찰기이자 그 세상에 투사한 자기성찰의 기록인 셈이다.
‘서얼’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
이념 지형에서의 양극단을 지양하는, 극우에 대한 혐오와 좌익에 대한 불편함이 배어 있는 저자의 입지점은 그 밑바닥에 ‘순결주의에 대한 거부’를 깔아두고 있다. 얼핏 모호하고 어정쩡해 보이는 ‘자유주의자’란 자기 규정은 획일주의,집단주의,다수결주의를 배격하고 불순함을, 소수자를, 약자를, 서얼을 옹호하는 데서 구체성을 얻는다. 이때의 ‘서얼’이란 바로 비장애인이 다수인 사회의 장애인이요,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이요, 지역차별이 엄존하는 이 사회의 전라도 사람이기도 하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란 어쩌면 일종의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 피해의식이 내 눈길을 소수파에게 돌려놓았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소수파의 중심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전라도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내가 전라도 언저리에 있듯이, 나는 빈민층의 언저리에 있고, 외국인 노동자의 언저리에 있고, 범죄자의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서얼단상, 274쪽)
정치 사회적 과정에서의 다수결주의도 끔찍하다. … 그런 견해는 대중이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런 가정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나는 ‘반민주주의자’이지만,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보다 상위에 있는 근본적 규범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규범들 가운데 하나가 소수집단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민주주의자다.(서얼단상, 124쪽)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씨가 후보로 뽑히기를 바란다. … 그 이유는 많다. 그것을 한 문장에 구겨 담자면 노무현 씨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소수파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무늬, 35쪽)
‘느슨한 연대’를 말하는 개인주의자
대개의 칼럼들은 기사문처럼 글쓴이가 ‘비칭’이나 ‘범칭’ 속에 숨은 채 객관화되어 있다. 그러나 고종석의 칼럼은 글쓴이 ‘나’가 직접 얼굴를 내미는 사적(私的) 언술이 대부분이다. 이는 저자의 개인주의자적 기질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개인주의자는 어느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궁극적 소수자로서의 개인’으로 파편화된 채 존재하지만, ‘개인(자신)을 위한 타인의 존중’이란 신념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연대의 고리로 작용하게 된다. 즉, 보이지 않는 그 존중의 끈이 그 개인들을 서로 연결하는 ‘느슨한 연대’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김진석이 내게 ‘어정쩡한 우파’‘희미한 우파’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나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우(右)는 우(右)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파(派)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아무 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아무 파도 대표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에게만 속해 있고, 나만을 대표한다.(서얼단상, 270쪽)
그들의 연대는 집단주의 정신이 강요하는 기계적․수직적 연대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정신 사이의 자발적 연대이고, 느슨하지만 깊은 연대이다. … 개인주의자들의 연대는 궁극적 소수의 연대이고, 반-획일주의의 연대다.(서얼단상, 184쪽)
여기서 저자는 어떠한 신념이든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되지 않고서는, 그 열정이 다수의 폭력에 다름 아닌 ‘희생제의’를 야기하는 ‘광신’으로 돌변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집단주의자가 집단을 사랑하듯 개인주의자가 개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 개인주의자는 개인을, 그러니까 타인을 ‘존중’한다. 집단의 자리에 개인을 들어앉히고 사랑의 자리에 존중을 들어앉히는 것, 그것은 20세기의 파멸적 유토피아니즘들로부터 해방되는 길이자, 만인(다수)에 의한 일인(소수)의 박해라는 형식으로 인류사를 관통해온 희생제의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자유의 무늬, 254쪽)
문화로서의 전체주의를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진리의 전유권(專有權)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열정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자유나 평등이나 민주주의나 인권이나 환경처럼 보편적이라고 알려진 가치들에 대해서까지도 이성의 계산기를 다시 들이대며 그것들을 섬세하고 구체적인 윤리의 체로 밭아보는 것이다.(자유의 무늬, 143쪽)
두 권의 책
비록 글의 길이에 따른 편의적 분책(分冊)이긴 하지만,『서얼단상』에는 관찰과 사유의 깊이를 보다 심층으로 몰고간 편편들이 모여 있고,『자유의 무늬』에서는 그 농축된 에스프리가 섬광처럼 빛을 발하는 단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단상들의 섬세한 무늬결 속에는, 인간의 이성,합리성이 많은 폐단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가 의지해야 할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 믿는 이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성찰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림으로써 그 편린을 엿보게 한 ‘함께 이루어갈 우리의 세상’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더불어 비루한 일상을 솔직히 응시하는 반성적 태도야말로 읽는이의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결국 나는 교육 자본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으로 깨닫고 있는, 그것이 사회관계 자본과 직결된다는 것을 바로 내 몸뚱어리로 실감해온, 그래서 이 빌어먹을 교육제도 속에서 다른 아이는 어찌 되는 그저 내 아이만은 그럴 듯한 대학에 가주기를 내심 열망해온, 지독한 가족이기주의자였던 것이다. (서얼단상,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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