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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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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진보는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  나쁜 차별과 사회가 정당화하는 차별
저자명 : 김진석
서지사항 : 사회/135*202/400쪽/2020년 9월 14일
가 격 : 20,000 원


도서소개

차별과 폭력 솔직히 바라보기

기본적으로 우리는 차별을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은 사람들의 나쁜 심성이나,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인권에 대한 의식이나 감수성 부족, 기득권층의 주도적 지배 등등에 원인이 있으므로, 사회가 진보적으로 바뀐다면 차별은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즉 그것은 법과 제도로써, 그리고 합리와 이성에 근거한 계몽으로써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그런 시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철학자 김진석은 이런 식의 이해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사회에서는 팩트들 자체가 폭력성을 띠며, 서로의 권리가 확장되면서 충돌하고 있다. 인권이나 평등 같은 기준으로는 해결난망한 ‘넓은 의미의 차별’이 늘어나는 것이다. 차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는 대목이다.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었지만, 위험에 대한 감수성과 안전에 대한 욕구도 커졌다.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연대하는 근대적 자유주의는 더 이상 과거처럼 지속되기 어려워졌다. 진보적 이념을 재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지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세상은 저 멀리 지나가고 있다. (…) 이 책은 착한 의지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갈등에 의해 유발되면서 다시 갈등을 구성하는 폭력이 사회에 완강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고자 한다. -‘들어가며’에서

‘넓은 의미의 차별’이란?
저자에 따르면, 차별에는 ‘좁은 의미의 차별’과 ‘넓은 의미의 차별’이 있다. 전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차별이나 동성애 차별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차별금지법 같은 제도로써 규제하고 개선해갈 수 있다. 문제는 후자다. 이는 “사회에서 여러 이유로 ‘정당하다’고 인정되거나 묵인되거나 심지어 생산되는 차별이다.”
예컨대, 회사가 되도록 우수한 인재를 뽑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학력 및 능력에 따른 차별을 만들어낸다. 부모들이 되도록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려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러면서 학력의 격차가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 집을 살 때 가능한 한 주변 환경이 좋고 미래에 가격이 상승하리라 여겨지는 곳의 주택을 사는 것도 누구나에게 권장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이 합쳐져 부동산가격의 격차가 생기고 차별적 갈등도 발생한다. 이런 문제들은 인권에 기대는 식으로 비판하고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을 차별이라 이해하며, 그런 것들은 쉽게 ‘나쁜 차별’로 분류된다. 하지만 앞서의 차별들은 오히려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이것은 도덕적 원칙이나 이념으로 해결될 수 없다.

피해자 구제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모순
이러한 차별을 없애는 일의 어려움은 ‘적극적 우대조치’의 한계에서도 드러난다. 기회의 차원에서 차별을 받는 소수집단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또는 따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적극적 우대조치다. 이 조치는 차별을 시정하는 좋은 제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소수에게 더 기회를 준다고 할 때 어떻게 그 소수에게 그 기회를 ‘공평하게’ 배분하느냐”는 문제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주로 대도시의 학생들이 ‘SKY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농어촌을 대상으로 적극적 우대조치를 도입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하게 될 것이다. 시험 성적에 의한 기존 제도의 폐해를 조정하기 위한 조치를 실행하려고 하는데, 다시 농어촌지역에서도 성적 우수 학생에게만 기회를 주는 셈이 된다. 여성이나 장애인이나 다른 소수집단이 대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약자와 소수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일이 다시 그 가운데에서 능력 있는 사람과 강자를 우대하는 일이 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다”.
능력주의로 인한 차별을 해소하는 과정에서도 능력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건 능력주의가 사회구조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회의 ‘팩트’ 자체가 이미 차별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넓은 의미의 차별(혹은 사회가 정당화하는 차별)을 풀기 어렵게 한다.

팩트 자체가 이미 폭력이고 차별이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인 ‘팩트 폭력(팩폭)’도 이런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다. ‘팩폭’이란 “넌 뚱뚱해” “넌 못생겼어”처럼 상대가 아파할 만한 사실을 대놓고 말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폭력이 되는 건 그 ‘팩트’가 이미 폭력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나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지방대생이라거나 수시로 입학했다는 것은 그냥 객관적 사실일 뿐이지만, 성적 위계 구조의 아래에 놓이는 현실의 맥락에서 ‘지잡대’니 ‘수시충’이니 하는 표현으로 팩폭을 당하게 된다. 누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하는 사실도 비슷하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팩폭이 늘어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들에도 폭력성이 점점 더 많이 스며들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팩트 폭력은 사회적 사실들이 이미 폭력성에 잠식된 과정의 결과나 증후라고 해석될 수 있다. 사실들이 가진다고 여겨졌던 객관성이나 합리성이나 공정성이 일정 정도 이상으로 의심될 때, 그것들(어떤 수준의 학력, 어떤 수준의 재산, 어떤 능력, 어떤 젠더, 어떤 지위, 어떤 국적 등)은 폭력성에 잠식된다. 이런 사실들은 사회제도 내부에서 묵인되거나 인정되거나 정당화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 이중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지시되고 인용된다. 시험에 참여해서 받은 어떤 점수와 스펙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정당성을 가지는 사실이지만, 입학과 고용 과정에서 그 점수(등급)와 사람의 능력에 대해 차등적이고 차별적인 효과를 가진다. 이 폭력적인 사실들은 기본권의 침해와 연결될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것들이 넓은 의미의 차별과 상관관계에 있다. -81쪽

사회의 폭력을 마주하는 어려운 길
저자는 이 책에서 집요하게 차별의 문제를 좇는다. 혐오 표현, 팩트 폭력, 학력경쟁, 차별금지법, 공정성 논란, 급진 여성주의자에 의한 트랜스젠더 차별, 능력주의 평가 시스템 등의 문제를 철학적·사회학적으로 분석·성찰하며, 그 안에서 차별과 폭력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 있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진보적 방향의 정책을 꾸준히 추구한다고 해서, 또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갖추고 ‘의식 있게’ 행동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결책이 궁금해질 법하지만, 저자는 성급한 대안 제시에는 선을 긋는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 시스템도 차별과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섣부른 대안보다는 차별과 폭력의 다양한 양상을 마주하고 또 마주한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떤 실천 태도를 가져야 할지는 그 후의 과제일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위험하고 폭력적인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그것이 무참하게 확대되는 광경을 그냥 맥없이 쳐다보는 일과는 다르다. 현재 사회에서 역사적 성과로 인권은 확대됐고, 안전도 점점 중요해졌다. 각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객체로 만들면서 또 주체로 만드는 많은 사실들이 알게 모르게 폭력성을 띤다. 사회 시스템들이 그 사실들을 생산한다. 이 사실을 견디거나 그것과 싸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겨우 자신이 폭력에 의해 대상화되면서 주체로서 구성된다는 폭력적인 사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 사실 앞에서 우리의 실천하는 태도를 제대로 다듬고 키울 때이다.
-381쪽



저자소개

김진석: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철학자와 문학비평가의 길을 가며 텍스트를 분석했지만, 텍스트 해석만으로는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정치로서의 삶과 직면해야 했다. 계간 『사회비평』 편집주간, 저널룩 『인물과 사상』과 계간 『황해문화』편집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Hermeneutik als Wille zur Macht』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초월에서 포월로』 『니체에서 세르까지』『이상현실·가상현실·환상현실』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소외에서 소내로』 『포월과 소내의 미학』『기우뚱한 균형』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더러운 철학』 『우충좌돌』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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