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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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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칼날 위의 평화  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
저자명 : 이종석
서지사항 : 정치/외교|576쪽|신국판| 2014년 5월 12일
가 격 : 28,000 원


도서소개

노무현의 피스게임
평화를 위한 불화를 넘어서

천안함 침몰로 장병 46명 사망․실종, 연평도 포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100여 명 사상, 휴전선 초소로 북한 병사 ‘노크 귀순’, 청와대 하늘 위로 북한 무인기 비행……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사건 하나 없이도, 정부가 국가안보에 무능하다고 격렬히 비난받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참여정부 시절! 그렇다면 여기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나는 이(종석)차장이나 (이해찬)총리하고 생각이 달라. 두 사람은 통일이 목표지만 나는 평화가 목표야.”(69쪽) 2005년 어느 날, 대통령 관저에서 NSC 사무차장으로서 보고를 마친 이 책의 저자 이종석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말을 건넸었다. 노무현 시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과 철학이 ‘평화번영’에 두어져 있음을 또렷이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이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가치를 관철해내는 일이 국내외적으로는 수다한 저항과 불화를 불러오곤 했다. 도대체 왜 그런 반발에 부딪친 걸까? 대통령직 인수위원에서부터 통일부장관에 이르기까지 정책참모로서는 참여정부에서 가장 오래 일했지만, 애초 비망록 같은 건 쓸 생각이 없었다는 저자가 한 권의 책을 내놓게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은 노 대통령의 시각에서 노무현 시대를 돌이켜보는 회고록의 성격도 부분적으로 지”닌다며.
참여정부가 물러난 지 벌써 8년차, 이제 와서 굳이 그때의 일들을 되짚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은 그동안 한쪽에서는 북한에 끌려다니며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다른 쪽에서는 미국에 굴종하면서 주권을 팔아넘겼다고 비난받아왔다. 이제 그런 비난들이 과연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 확인한다는 의미다. 둘째, 크든 작든 참여정부가 이뤄낸 외교안보적 성취를 무(無)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국정 운영의 암묵지(暗黙知) 전수가 ‘전임 정권 흔적 지우기’라는 병폐로 단절되지 않게끔 하려는 뜻이다.
참여정부에서 국가안보 컨트롤타워의 소임을 감당했던 책임자로서, 저자는 ‘평화’라는 지향점을 떠받치는 두 축을 ‘자주’와 ‘균형’이란 단어로 압축하고 있다. 자주국방과 균형외교를 지렛대 삼은 노무현식 평화는 기존 외교안보노선에 익숙한 국내외 세력은 물론 보다 급진적인 변화를 바라는 입장과도 불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는 곧 칼날 위에 선, 위태로운 평화를 조율해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라크 추가파병’ 강행의 이유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허물어뜨린 정치적 실책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렇다면 이라크전을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말한 노 대통령이 왜 그런 결정을 했던 걸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 절반을 잃는 문제를 고려요소에 넣지 않았다. 대신 파병 요청의 ‘수용’과 ‘거절’ 사이에서 균형추를 기울게 할 요소는 북핵문제라고 결론지었다. 대통령은 북핵문제로 불안정해진 한반도 평화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전향적 입장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우리가 능동적으로 미국과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통령은 여러 회의에서 반복해서 우리가 추가파병을 하게 된다면 한반도 상황의 안정이 그 전제가 돼야 한다며 북핵문제의 진전을 강조했다. (197쪽)

정부 안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북핵문제와 파병을 연계시키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불편한 소리를 했지만 6자회담 진전을 희망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 점차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을 방문한 라종일 보좌관으로부터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제2차 6자회담이 조기에 개최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고 있다”며, 한발 더 나아가 “6자회담이 조기에 재개되고 회담에서 실질문제 협의에 진전이 이루어지는 여건이 조성될 경우, 파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210쪽)

이렇게 미국이 6자회담 개최와 대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추가파병(자이툰 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절반의 지지자를 잃게 되었지만, 북핵문제는 대화를 통한 해결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끌어 앉힌 ‘비료’
참여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6자회담이 개최되었지만, 2004년 여름 남북관계가 얼어붙는 사건이 일어났다. 베트남에 있던 탈북자 468명을 대거 한국으로 이송하여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온 것이다.

정부는 다양한 외교라인을 통해 베트남 정부와 접촉하여 문제해결을 시도했다. 이 외교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보기관도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6월 말 베트남 정부는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고 철저히 대외 보안을 지킨다는 전제로 우리측 전세기를 이용한 탈북자의 국내 이송에 동의했다. 양국은 베트남 체류 탈북자 전원을 7월 27∼28일 양일간 전세기편으로 우리나라로 이송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송 바로 전날 베트남 현지에서 탈북자를 돕는 선교단체를 통해서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 정부는 우리 대사관을 찾은 탈북자에 대해서 국가의 의무를 다해 보호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먼저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북한은 이 사건을 자국민 납치로 규정하고 남한을 맹렬하게 비난했으며, 8월로 예정된 남북장관급회담을 무산시켰다. (…) 국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 사건이었다.(286쪽)

이 일 이후로 2004년 하반기에는 공식적인 남북대화가 단절되었다. 정부가 추진한 대북특사 파견도 북한이 거부했다. 상황을 바꾼 것은 비료제공 문제를 둘러싼 남북간의 줄다리기였다. 2005년 초 북한은 한국적십자에 그해 농사에 필요한 비료를 요청해왔다. 정부는 비료제공을 늦추며 북한이 대화 테이블로 이끌었다. 북한은 1월부터 3월까지 일곱 차례나 전통문을 보내오며 협박조에 가깝게 비료제공을 갈구했지만, 정부는 계속 버티며 북한의 대화 복귀를 촉구했다. 결국 5월에 북한을 비료제공과 함께 남북대화를 재개하기로 결정한다.

북한은 5월 16일에 ‘남측에서 비료를 실은 첫 배를 띄우는 것과 동시에 차관급을 수석대표로 하는 실무회담을 개성 또는 금강산에서 갖자’고 제의해왔다. 북한은 “북남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돌파구 마련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북남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가장 절박한 현안 문제는 비료협력 문제임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4개월을 끈 남북간의 ‘전통문 줄다리기’는 막을 내리고 전면적인 남북대화 시기가 도래했다. 4개월간의 지루한 ‘기싸움’이 끝나고 대화로 접어드는 조정국면은 ‘순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짧았다.
(292쪽)

‘주한미군 감축’ 이면에 숨겨진 미국 일방주의와의 쟁투
2004년 한국 사회를 분열에 가깝게 몰고 간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그 사회적 공론화를 둘러싸고 바람직한 동맹관계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줬다. 그리고 참여정부는 강대국의 일방주의에 맞서 약소국의 지혜로운 줄타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감축계획을 통보했다.

다음날 저녁 윤영관 장관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 럼스펠드는 미측의 계획을 노 대통령 방미 때 통보하자고 주장했으나 국무부 등이 성공적인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루자고 하여, 한미정상회담 후 롤리스가 방한하여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윤 장관의 전화를 받고 나서 NSC사무처의 판단이 옳았다는 안도감보다 비애감을 느꼈다. 1만2500명의 주한미군 감축은 그것이 한국 안보에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계없이 한국 국민에게는 첨예한 관심사이며 심각한 정치적 쟁점이다. 이를 뻔히 알고 있는 미국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이 요구한 용산기지 이전과 주한미군 재배치를 수용하여 야당과 보수언론으로부터 안보불안을 일으킨다고 비난받는 것을 감수한 참여정부에게 주한미군 감축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보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이라크 1차 파병까지 결정한 한국 정부에……! 이렇게 되면 부시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계획안을 속에 감춘 채 두 달 전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재배치를 한반도 안보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한낱 연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98~99쪽)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길 원했으나 외교부와 국방부 관리들은 감축 자체를 철회시켜야 한다며 공론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미국이 감축 논의의 공론화에 부담을 느끼면서 논의 자체를 1년 연기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합의를 다시 일방적으로 깨고 감축 논의를 일찍 시작하기를 원했으며, 주한 미2사단 병력을 이라크로 차출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니 한국 정부가 곤란한 지경으로 몰렸다. 이라크 사태가 어려워져서 주한미군을 차출했다고 하면, 한국 국민은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주한미군의 재조정, 즉 감축을 시사하는 GPR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1개 여단을 차출하겠다고 하니, 이제 한국 정부는 미국의 감축 계획도 눈치 채지 못하고 아예 협의조차 제의받지 못한 ‘호구’처럼 되어버렸다. 심하게 말하면, 미국은 자기가 욕먹지 않기 위해 잘못 없는 친구를 자기 대신 비난의 구렁텅이로 처넣은 셈이었다. 미국이 이라크 사정이 다급해져서 주한미군을 차출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뻔한 사실이었다.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차출에 대해 이라크 사정 때문으로 이해한다고 하자, 이번에는 한미의 설명이 엇박자가 난 점을 문제 삼아 한미동맹 이상설이 퍼졌다. 부시정부의 일방주의는 이처럼 동맹에게 상처를 입혔다. (133쪽)

이렇게 일방적인 미국의 행동은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역력히 보여주었으며 노 대통령은 이후 더 강력하게 자주국방 노선을 추진했다. 감축 협상에서도 미국에 당당히 대응하는 과감한 태도를 보였다.

협상 마지막 날, 필연적인(?)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10월 초, 롤리스와 막바지 감축 협상을 하던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시간이었는데 안 실장은 지금 롤리스를 만나러 간다며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차장님, 큰일 났습니다. 롤리스가 만약에 자기들이 제안한 ‘2년’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장 내년에 다 빼겠답니다.” 미측의 입장이 강경하니 2년간 1만2500명 감축안이라도 수용하자는 얘기였다. 그 순간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그러면 그냥 빼라고 그러세요. 협상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협상 왜 합니까? 그렇게 얘기하세요. 제가 그러더라고. 우리랑 협상 왜 하냐고, 그냥 내년에 다 빼라고.” (…) 다음날 아침 안 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주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감축 협상이 우리측의 제안대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최고의 한국 전문가인 롤리스를 맞아 능동적으로 대미 감축 협상을 마무리한 안 실장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136~137쪽)

뿌리 깊은 미국 의존심리에서 자라난 내부의 반발과 항명
참여정부가 극복해야 했던 건 미국이라는 바깥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정부 내의 뿌리 깊은 대미 의존 심리는 정부의 정책 운영에 큰 걸림돌이 됐을 정도다. 그러면서 자주국방을 향한 길에서 은연중에 지시를 이행하지 않기도 했고, 보고를 묵살하는 항명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런 심각한 미국 의존심리로 인해 그들은 자주국방을 불온시했을 뿐 아니라 우리 군의 능력을 계속 평가절하했다. 그것도 군 스스로 자신을 비하한 것이다.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자신의 전력이 열세라는 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미 군사정보 당국은 2004년 5월부터 공동으로 ‘포괄적 안보상황 평가’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이때 미 국방정보기관DIA이 자체 작성한 안보상황 평가서를 우리에게 보내왔는데, 거기에 “남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현재now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새로운 평가가 들어 있었다. 이 평가에 우리 국방정보당국은 흡족해하기는커녕 되레 우리가 열세라며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방부는 미측 평가에 반대하면서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이나, 한미연합 전력 유지시 대북억제가 가능하다”는 평가를 내놓고, 한미 공동의 보고서에는 이 문구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방부가 우리 전력이 북한보다 더 세다고 하는데, 우리 국방부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이 상황은 한 편의 촌극을 보는 것 같았다. (89~90쪽)

당시 외교부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김정일을 좋아하는 세력과 싫어하지 않은 세력을 합치면 20%라고 하는데 노무현 지지층과 딱 맞아 떨어진다”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 젊은 놈들이 미국과 외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어린애들이 와서 나라를 망쳐 먹는다” “노무현정권의 출범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아마추어 노무현과 달리 무조건 친미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군부는 의도적으로 정부를 곤란에 빠뜨리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2004년 우리 해군의 경고방송에 대한 북한군의 응답 사실을 숨기고 대응 사격만을 보고한 해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남북은 그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NLL에서 의도치 않게 경계선을 넘을 경우 서로 통신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여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협약을 맺었다.

나는 남북교신이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 정부가 언론의 질타를 받고 어렵게 이룬 남북합의가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군이 나중에라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보았다. (…) 기만통신이라 해도 보고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더욱이 국방정보 관련기관이 특수 통신기록 일부를 자의적으로 삭제하여 보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군이 기만통신으로 간주해서 보고하지 않았다면, 청와대의 질문이 있었을 때나 국민적 의문이 확산되던 시점에는 밝혔으면 될 일이었다. 모든 게 석연치 않았다. (…) 박승춘 국방정보본부장이 일부 언론을 만나 사건 발생 당시 북한 함정과의 교신 내용, 북한의 통지문 등 특수정보를 유출하며 당시 군의 대응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며 문제의 본질을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시켰다. 사실상 이건 ‘항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당장 보수 언론들은 군이 청와대로부터 부당하게 핍박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7월 20일 보수 언론의 사설들은 “NLL 침범은 침묵하고 보고 여부만 따지나” “북에 휘둘리고 우리 군을 매도할건가” “북 경비정의 ‘위장남하’부터 규명을” 등등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제목으로 가득 찼다. (278~280쪽)

참여정부는 NSC사무처를 중심으로 한 통합적인 안보 시스템을 갖춰나가며 내부의 이런 반발을 컨트롤하고 무마하면서 자주와 균형을 통한 평화 정책을 추구해나갔다. 그 경험은 정권의 철학을 거부하는 관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이제야 밝힐 수 있는 이야기들
-비밀 계획의 누설자는 바로 미국 관계자
2004~2005년 한국과 미국 사이에 북한 내부의 급변사태를 대비한 ‘작전계획 5029’를 둘러싼 극비 논의가 있었다. 미국은 가상의 ‘개념계획’으로만 존재하던 ‘5029’를 실제로 한미연합사가 맡아 실행하는 ‘작전계획’으로 추진하길 원했고, 정부는 북한에 전쟁 외의 급변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 대응 주체는 당연히 한국 정부가 되어야 하기에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논의 와중에 그 내용이 한국 언론(신동아)에 보도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은 물론 미국도 강도 높게 반발했다. 극소수만 알고 있던 비밀 계획을 누가 누설한 것이다. “보도를 계기로 한국 정부의 보안 신뢰도는 크게 추락했고, 한미동맹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5029’와 관련한 대미협상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정부 안에서 끝끝내 잡아내지 못하고 말았던 기밀 누설자가 뜻밖에도 ‘미국측’이었음을 최근 저자가 확인해냈다.

나는 이 책의 집필을 마무리하면서 황일도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오래전에 이미 여러 차례 물었어도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밑져야 본전인 셈치고 마지막으로 다시 물어보았다. 이제는 세월이 꽤 흘렀으니 얘기해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며, 당시 누구에게서 취재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그는 취재원이 미국측 인사였다고 했다.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 없지만, “당시 차장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 미측 인사로부터 얘기를 듣고 나서 여기저기 추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국방문제를 취재해온 황일도 기자는 “아마 미국 쪽에서 차장님 입장을 어렵게 해서 ‘5029’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계산을 했었던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의 말로 미루어 미측 인사는 바로 미 당국자였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한미간 논의에서 한국 정부를 수세로 몰아넣기 위해 미국 당국자가『신동아』에 제보해서 발생한 일이라니, 황당하고도 참담했다.『신동아』 보도가 아니었다면 나는 미국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작계 5029’를 한국 언론에 흘려놓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걸로 한국 정부를 쥐고 흔들었단 얘기 아닌가. 한국 정부가 언론에 일부러 누설한 것 아니냐는 미국측의 추궁에 보안을 지키지 못한 ‘죄’로 대꾸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는데……! (153~154쪽)

-미국, 일본, 유럽도 몰랐던 경수로 청산의 비밀
제네바기본합의에 따른 경수로 사업을 종료시킬 때, 그 청산비용은 1억5000만 달러로 추산될 정도로 막대했다. 그런데 같이 사업에 참여한 미국도, 일본도, 유럽도 이 비용을 부담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은 이미 경수로 공사비용으로 11억 달러를 들이기까지 한 터에 청산비용까지 대부분을 떠안게 생긴 상황이었다.
그때 저자는 공사를 담당한 한전 관계자로부터 기성고 잉여금(공사비용 중 아직 쓰지 않고 남은 돈)이 2억 달러 정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는 이 돈을 청산비용으로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외부에 절대 이 돈의 존재를 노출시키지 않은 채 한국이 청산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재활용할 수 있는 경수로 기자재(7억 달러 상당)을 인수하는 전략을 세웠다. 기성고 잉여금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나라는 청산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복안에서다.

NSC 상임위를 통과한 이 전략은 KEDO 경수로 청산 과정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경수로 사업 종료는 이 전략에서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 (…) 2006년 5월 31일 KEDO 집행이사회는 한국이 제안한 일괄청산 방식에 동의하고 경수로 사업을 공식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한전은 기성고 잉여금 2억 달러로 1억5000만 달러 내외의 청산비용을 부담하고 약 7억 달러 상당의 경수로 기자재를 인수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밝힐 수 없었던 비책이 나름대로 성공한 것이다. (493~494쪽)

-국가재난위기, 대통령 직속 시스템으로 대응토록
세월호 참사로 인해 NSC 위기관리센터의 역할 범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박근혜정부 김장수 안보실장이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고 한 때문이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직속의 국가안보 컨트롤타워로서 재탄생한 NSC는 통합적 안보 시스템으로 포괄안보의 개념을 도입된 조직이다. 안보 환경이 복잡해지고 있는 현실에서는 국방과 외교 같은 전통적 안보뿐 아니라 재난․재해․소요․테러․전염병 등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른 영역도 통합 관리할 기구가 필수적이었던 탓이다. 국민의 안전에 대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NSC 위기관리센터가 안보 분야뿐만 아니라 재난재해 업무에 관한 컨트롤타워로서 역할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청와대에 컨트롤타워가 있으면 재난재해 발생시 대통령에게 직접 부담이 전가된다며 반대했다. 따라서 국무총리실이나 관련 부처에 컨트롤타워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어떤 (대형) 사고가 나도 국민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기구인 NSC위기관리센터가 재난재해의 컨트롤타워를 맡아 책임 있게 대처하는 것이 옳다”고 명쾌하게 답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여러 부처가 관련되어 있는 재난 재해 업무를 권위를 가지고 조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도 대통령실의 관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53쪽)

게다가 NSC는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많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총 264개의「기관별 위기대응실무매뉴얼」을 작성·완료했다. 이것 또한 참여정부의 주요한 성취이다. 이는 ‘국가안전처 신설’ 운운하기 전에 작금의 현실에서 새로운 재난대응책 마련의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이종석: 통일외교안보에 관한 한 노무현과 ‘한몸’으로 평가받는 저자는 현재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자 한반도평화포럼의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16대 대통령직 인수위에 참여해 ‘자주국방과 균형외교를 통한 평화번영’이라는 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전략의 밑그림을 그리는 한편, 이를 구현할 컨트롤타워로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체제를 설계했다. 참여정부에서는 NSC 체제의 실질적 책임자인 NSC 사무차장으로 재직하며, 당대 한반도 외교안보의 최전선을 지켰다. 2006년부터는 통일부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으로 일했다. 이 책은 저자의 비망록인 동시에, 이제 스스로는 자신의 시대를 돌이켜볼 수 없게 된 대통령을 대신해 그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던 참모가 남기는 회고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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