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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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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더러운 철학  철학, 더러움에 빠지고 더러움을 무릅쓰다
저자명 : 김진석
서지사항 : 인문,철학|328쪽|신국판|2010년 1월 22일
가 격 : 15,000 원


도서소개

‘지식인의 비굴함과 나태’를 고백한다

‘소칼 사건’ 혹은 ‘지적 사기’. 1996년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인문학술지 『소셜텍스트』에 엉터리 논문을 게재한 ‘사기극’ 뒤에 벌어진 논쟁까지를 일컫는 용어다. 당시 ‘과학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벌어진 이 논쟁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담론을 만들고 퍼트리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여기서 당시 논쟁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고백을 다시 떠올려보자. “지식인의 비굴함과 나태는 우리 시대의 올림픽 종목이 돼버렸다.”
“구체적이고 이질적인 다양성들이 (…) 압도하는 시대”(34쪽)에 사는 한국의 한 철학자도 자신의 학문이 처한 무력감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 책 『더러운 철학』에서 저자는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자와 사기꾼은 얼마나 다른가.”
이 문답 뒤에 저자는 철학이 지닌 본래의 임무, 즉 ‘보편적 원칙 탐구’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것들에서 툭툭 손을 털기로 했다. 그것들보다는 어떤 정책이 포획하는 행위들과 포획하지 못하는 행위들에 관심을 가졌다. 일관되고 깨끗한 이념이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더러운’ 행위들을 이해하려고 했다.”(35쪽) 여기서 우리는 이 책 제목에서부터 표방하고 있는 ‘더럽다’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저자는 현실 도처에 뿌리내리고 있는 다양한 철학 담론들 속에서 더러움을 찾아낸다. 그가 골라낸 ‘더러운 철학’은 ‘노자의 무위자연’ ‘도올의 대중 철학’ ‘들뢰즈/가타리의 리좀·노마디즘·전쟁기계’ ‘네그리의 다중’ 등의 다양한 담론이다. 그 다양한 주장들 속에서 어떻게 더러움을 가려내겠다는 것일까.

순수한 담론, 더러운 현실

저자의 ‘노자의 무위자연’에 대한 비판은 그 순수함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묻는다.

노자의 무위와 자연은 서양의 패권적 형이상학과 비교하면 훨씬 순수하고 덜 해로우며, 따라서 노자는 비판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런 형이상학적 성역과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말자. (…) 노자의 ‘무위’와 ‘자연’은, 서양의 ‘폭력적’ 혹은 ‘패권적’ 사유에 단순 대비되면서,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형이상학으로 치닫고 있고, 그 경향은 후자와 방식은 다르지만 후자 못지않게 공허하고 맹목적이다.(125~126쪽)

저자는 노자의 자연을 ‘생태 근본주의적 자연’이라고 부르며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이러한 근본주의적 시각과 산업사회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혼동하는 오류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김종철의 『녹색평론』이 대표적 사례다. 저자는 김종철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순수한 담론만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러움을 무릅쓰는’ 담론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뜻이다.

문명 속의 폭력성은 산업사회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들이 제 안에서 끌어내고 실현하려는 최대한의 자유와 자발성과도 깊은 관계에 있다. (…) 생태적 열망도 이 자유와 자발성의 한 열매가 아닐까? 이에 대한 성찰과 논의 없이 도덕적 주장만을 반복하는 것을 경계하자.(129쪽)

들뢰즈/가타리와 함께 진흙으로 뛰어들기
저자가 말하는 ‘더러움을 무릅쓰는’ 철학은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를 오가며 치고 치인다. 저자는 현대 서양철학의 대표적 논쟁거리인 ‘리좀’ ‘전쟁기계’ ‘노마디즘’을 차례로 불러내며 이 용어들의 철학적 쓰임새의 ‘더러움’을 논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알려진 대로 서양의 사유 체계가 ‘나무 중심’이라며 비판했다. 그들은 나무와 나무뿌리의 은유에 사로잡힌 철학에서 벗어나고자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흔히 ’땅밑 줄기‘로 정의된 리좀은 그 뜻에서 드러나듯 기존의 주제에서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다양한 생각들을 대표한다. 저자는 리좀이 표방하는 그 다양성이 자칫 나무문화를 과격하고 극단적인 비판적 성격만 부각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회의하고 또 회의한다.

이 과격하고 극단적인 성격의 나무문화 및 문화나무 비판은 충분히 구체화되고 있는 것일까? 그 비판은 철학에서 시작해 모든 지적 사고 체계를 거쳐 사회생활의 뿌리로 존재하는 나무뿌리 문화를 과연 ‘뿌리 뽑을’ 수 있을까? (…) 기존의 사유와 문화가 지나치게 근거와 중심, 영토와 국가에 사로잡힌 것은 사실이다. (…) 현대 이후 사람들은 상당히 거기에서 도망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들뢰즈/가타리는 아주 근본적으로, 아주 전반적으로 나무문화와 문화나무에서 이탈하자고 부추기는 것이다.(230쪽)

들뢰즈/가타리의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전통적 사유 체계를 벗어나 더러움을 무릅쓰는 것은 가능할까? 저자가 보기엔 쉽지 않다. 그들은 나무중심 문화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다름 아닌 이분법적 서술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벗어나고자 하는 나무의 계통적 질서인 바로 그 이분법을 사용하는 셈이다.”(237쪽)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자신의 이분법적 서술이 리좀을 도입하려는 고육지책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또한 저자는 “그렇다면 애초에 과격하게 드러났던 리좀의 파격은 다시 수그러들거나 길들여지는 것이 아닐까?”(238쪽)라고 되묻는다.
이렇게 영원히 순환하는 듯한 논리의 반복, 저자는 이를 ‘영토화와 탈(脫)영토화의 이어달리기’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무들, 뿌리에 집착하며 이분법 조직을 조장하는 나무들은 더럽다. 철학은 이 ‘더럽다’는 말을 칼을 던지듯 나무에게 던진다. ‘더러운 나무’. 나무들은 이 말을 들으며 머쓱해한다. 우리가 그랬나? 우리가 그런가? 중얼거린다. 더러움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제 몸에 들러붙는 그런 것이다.(244쪽)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더러움’은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바로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의 더러움을 어느새 제 몸에 묻힌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 “구차스러움과 뻔뻔함 사이에서”(245쪽) 흔들린다.
들뢰즈/가타리의 또 다른 주제, ‘전쟁기계’와 ‘노마디즘’도 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맞서 ‘더러움을 무릅쓰고자 했던’ 대표적 주장들이다. 여기서 저자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전쟁기계와 노마디즘을 ‘수입’하면서 이 한글판 담론이 “국가와 독립된, 그것을 깨끗하게 초월하는 움직임”(252쪽)에만 주목하는 것이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이 둘의 능동적 혁명성은 인정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이 담론들이 발현되는 ‘변덕스러운’ 모습은 해설하지 못한다는 평이다.

전쟁기계는 국가장치 외부에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국가 장치 없이 홀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깨끗하게 국가를 초월해 존재하지도 않았다. 험악하고 과격한 전쟁기계는 국가와의 관계에서 더러운 존재였다. 언제나 자신을 배반하듯 국가와 제국으로 통합되곤 하는 존재, 그러나 그런 자신을 또 배반하듯 다시 국가 장치에 탈을 내게 하는 존재. 엉뚱하고 삐딱한 존재.(252쪽)

약자로서의 유목민도 그저 ‘착한’ 노마드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소수자인 이주 노동자들을 예로 들어 말해보자. 그들은 우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오로지 ‘착한’ 노마드일까? 굳이 말하자면 ‘복합적인’ 노마드일 터이다. 그들도 더 좋은 일거리를 찾아, 자신들의 행복을 찾아, 고향을 떠난 유목민이다. (…) 노마드가 전쟁 기계의 복합체로 존재하는 한, 유목민들은 ‘따로 또 같이’ 폭력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그 폭력적 끈의 긴장 속에서 문명적으로 생존한다. 마찬가지로 문화산업과 결합한 ‘한류’도 거센 유목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다.(279쪽)

다중(multitude)에서 찾아낸, 엉뚱하고 심오한 대중
혁명적 능동성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실의 개인이 매분 매초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다른 독립적 개인들과 자유로이 소통하는 것은 청사진일 뿐이다. 저자는 현대 인간의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인간 개개인이 특정한 사회와 국가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가진다. 다시 말해 현대의 인간은 “장기 지속적인 기구와 장치에 탈을 내고 또 이탈하되, 초단기적으로, 전자의 흐름처럼 순간순간마다 변화하는 유동성을 상정한다.”(288쪽)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국가의 장기 지속성에 과도하게 매달려 있다. 보수와 진보에게는, “비교적 다양하게 개체들의 자유와 선택을 보장하고 요구”(288쪽)해주는 자유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보수와 진보의 장기지속적 이분법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입의 사례로, 저자는 2008년 촛불시위를 예로 든다. 노무현 정부 당시 “값싸게 보장”되었던 자유가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너무 귀한 것”(290쪽)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이때 등장한 몇몇 지식인들의 ‘파시즘 정부’ 운운이 마음에 걸린다. 저자가 보기에 ‘파시즘’ 주장은 무책임한 발언일 뿐이다.

2010년 봄에는 지방선거가 있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거부의사를 표시했듯이 시민들이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비슷하게 한다면, 정치적 회복의 기회는 있다. (…) 선거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은 해야 한다. 거기까지 해보지도 않고 무작정 정부에 파시즘 비난을 퍼붓는 것은 무책임하게 보인다. 만일 내년 지방선거 때도 저항과 거부 의사를 확실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때도 이 정부를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일이 제일 급한 일도 아니고 능사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도 시민들의 책임을 묻는 게 먼저일 듯하다. 툭하면 ‘파시즘’ 운운하는 일은 시민들의 여러 필수적 책임에 대한 성찰을 건너뛴다.(292쪽)

좌파들의 ‘파시즘’ 주장보다 저자는 ‘자유주의적 관점’이 오히려 한국 사회에 적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좌파는 매번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자유주의는 그 잣대에 집착하지 않으며 개개인의 생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왜냐하면 정치와 생활은 올바름만 축으로 삼아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자유를 추구하는 행동은 때로는 모호하고 애매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그 모호함과 애매함을 추방하거나 배제하려 들지 말고, 포용하고 포섭해야 한다. 그것이 대중 민주주의의 요체 중 하나이다.(298쪽)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시대 변화에 맞춘 “정치적 상상력의 출발점”인 동시에 “진보적 담론이 설정하는 것보다는 덜 장기적이며 유동적이며 이질적인 개체들을 설정”하는 철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즉 자유주의적 인간은 현실의 더러움을 직시한다. 자유주의적 인간은 엉뚱하고 과격해보일지라도 자신만의 사유를 즐기며 자율적인 삶을 산다. 저자는 이런 엉뚱하고 삐딱한 개체들을 ‘더러운 주체들’이라고 이름 짓는다. ‘더러운 주체들’은 네그리가 말한 다중(multitude)과 의미가 통하는 개념이지만, 저자는 ‘다중’이 한국인의 독특한 면을 해설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다중’은 “한편으로는 미국이나 세계화를 동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어긋나는 민주적인 열망을 강하게”(307쪽) 지닌 한국인들의 복잡한 면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다중’ 개념이 요구하는 저 이중적 특성, 곧 나름대로 각자의 차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집단적 저항력을 발휘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젊은이들이 보여준 방식에서 저자는 ‘더러운 주체’의 상을 발견한다. 과거의 시위 형식과 주제에 비하면 무척 ‘안전하고 쫀쫀해’ 보이지만, ‘복잡하고 삐딱한’ 새로운 표본은 ‘더러운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이 ‘더러운 주체’들의 저항에서 철학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전망을 내놓는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높고 깊은 곳에서 심오함을 찾았다. 그런 철학은 오늘날 오히려 더러움에 빠지기 쉽다. 이제 심오함을 포기할 것인가? 그것을 포기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쉽지만, 철학적 사유는 그것의 성격 때문에도 그걸 쉽게 포기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엉뚱하고 삐딱하고 우스운 행동들을 통해서 심오함을 찾는 길이 있다. 이 철학은 더러움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다.(316쪽)



저자소개

김진석: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철학을 하고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은 매력이 없었다. 1980년 5월 군 입대. 군대는 10여 년 동안 악몽을 꾸게 만든 지독한 경험이었다. 제대와 함께 미련 없이 학교를 자퇴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철학 교수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다. 철학자와 문학비평가의 길을 가며 텍스트를 분석했지만, 텍스트 해석만으로는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정치로서의 삶과 직면해야 했다. 계간 『사회비평』 편집주간, 『인물과 사상』 편집위원을 하면서, 우파와도 부딪치고 좌파와도 부딪쳤다. 자신의 철학적 개념을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갈수록 말과 글의 허장성세를 견디기가 힘이 듦을 느끼고 있다.

저자의 다른 책들 『Hermeneutik als Wille zur Macht bei Nietzsche』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초월에서 포월로』 『니체에서 세르까지―초월에서 포월로 2』 『이상현실․가상현실․환상현실―초월에서 포월로 3』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소외에서 소내로』 『포월과 소내의 미학』 『기우뚱한 균형』 『니체는 왜 민주주의를 반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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