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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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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여자들
저자명 : 고종석
서지사항 : 역사,인물|284쪽|변형국판|2009년 12월 15일
가 격 : 13,000 원


도서소개

자이노파일 에세이스트, 서른네 여자를 만나다

나는 문득 지금 이곳이 1920년대의 파리나 팜플로나라고 상상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커다란 전쟁’이 할퀸 자국으로 흉흉하다. 나는 내가 삼십대 중반의 여자라고 상상해본다. 브레트 애슐리라고, 중년에 접어든 사랑의 망명객, 사랑의 떠돌이라고 상상해본다. 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179쪽)

오십대 사내가 자신을 삼십대 여자라고 오롯이 상상하는 일이 가능할까? 혹은 그렇게 상상하는 일이 과연 있기나 할까? 모르긴 몰라도 한국 남자들은 사는 게 바빠서 그런 상상을 해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책은 빼어난 에세이스트로 손꼽히는 고종석이 ‘여자들’에 대해 쓴 에세이다. 날카로운 시평과 언어에 대한 섬세한 에세이로 성가를 드높인 그가 이번엔 여자들에 대해 썼다. 오해하진 마시길. 고종석의 연애담은 아니다. 그의 글이 언제나 그렇듯, 인문학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인물 에세이다. 고대․중세 때의 전설적인 문인과 여제, 격동의 20세기를 거침없이 헤쳐온 혁명가들, 몇 년 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 더러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에서 활약한 이들 등 서른네 여자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측천무후, 로자 룩셈부르크, 다이애너, 최진실, 사유리처럼 낯익은 이들도 있고, 니콜 게랭, 마리 블롱도, 라마 야드, 라 파시오나리아처럼 눈에 선 이들도 있다. 수많은 여자 중에 이 서른네 사람은 어떻게 낙점됐을까?

역사에 기록되는 ‘행운’을 지닌 여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주로 극단적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다. 전형적 예로 잔 다르크를 들 수 있다. 그녀에겐 성녀(聖女)의 이미지와 광녀(狂女)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그녀를 저주하며 불태워 죽인 사람들에게나 그녀를 ‘오를레앙의 성녀’로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나, 잔 다르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거처는 천당이거나 지옥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위에는 그녀의 자리가 없다. 특별히 악독하거나 특별히 거룩한 여자들만 역사에 기록된다. (…)
이 책이 살필 여자 서른네 사람이 반드시 그런 극단적 여성들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평범한 여자들도 아니다. 너무 평범해서 역사 기록자의 눈이나 작가들의 상상력에 걸려들지 않은 여자(들)를 내가 찾아내거나 지어내서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므로. 우리가 엿볼 여자들은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여자들이다. 그녀들의 존재론적 범주는 넓다. 누구는 지금 살아 있고 또 다른 누구는 이미 죽었다. 누구는 삼십대 장관이고, 또 다른 누구는 사십대 소설가다. 더 나아가 소설가가 만들어낸 인물도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의 주인공들을 실존했던(하는) 여자들에 한정하지 않았다. 예술가의 상상력 속에서 빚어진 여자들도, 그러니까 예술작품 속의 여자들도, 그 삶이 흥미롭다고 판단되면, 나는 펜을 들이댔다.
(7-8쪽)

편파적인, 그러나 공정한 시선
자이노파일(gynophile: 자이노는 ‘여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gune]가 어원이고, 파일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형태소[-philes]가 어원이다. 쉽게 풀어쓰면 ‘여자 애호가’라는 뜻)임을 자처하는 지은이가 그려내는 여자들 이야기는 인물들의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다채로운 빛깔을 띤다. 그럼에도 그 다채로운 빛깔을 감싸는 은은한 한 줄기 빛을 독자들은 감지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지은이가 ‘사랑하는’ 여자들임이 분명하지만, 그 사랑은 일방적인 찬양과 고무와 예찬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세간의 평이나 굳어진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좇지도 않는다. 지은이는 자신을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자이노파일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시각에선 ‘공정함’이 느껴진다. 역사가, 사회가, 트렌드가 만들어낸 표피적이고 일면적인 평가가 아니라, 인물 개인을 오랜 시간 바라보고 그 내면과 깊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획득된 그런 공정함 말이다.
시끌벅적한 연말의 거리를 배회하는 대신,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묵직한 사색을 이끄는 정통 에세이와 조용히 만나는 것도 연말을 뿌듯하게 보내는 좋은 방편일 것이다.

나는 로자의 만년에 러시아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나는 로자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로자의 사회적 전망에는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는 레닌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지만, 10월혁명을 전후한 레닌의 독선적 행태에 부정적이었다. (…)
로자에게 자유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위대한 반대자’라 불렸던 미국 법률가 올리버 홈스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자신이 죽은 뒤 70년간 존속했던 사회주의 사회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자유’의 한계라면, 나는 잠재적 로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충실한 로자주의자는 못 될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남고 싶다고 되뇌었지만, 나는 현실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18-19쪽)

제 삶을 당사자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생겨난 삶을 제 뜻대로 처리하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다. 최진실의 자살이 미웠던 건, 그 자살이 그녀가 진짜 원했던 바가 아니었으리라는 어림짐작 때문이다. 두 아이를 그렇게 아꼈던 여자가, 칡넝쿨 같은 생명력을 지녔던 여자가, 긴 생각 끝에 그런 결정에 이를 수는 없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홧김에 죽음의 세계로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밉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억척스러워 보였던 그녀가 고작 일부 대중의 적의敵意 따위에 허망하게 무너진 게 밉다. (27쪽)



저자소개

고종석: 1959년 서울 생.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언어사상사와 사회언어학을 공부했다. 코리아타임스 경제부, 한겨레 문화부,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에서 스무 해 남짓 일했다. 현재 도서출판 개마고원 기획위원. 지은책으로 『제망매』(1997), 『감염된 언어』(1999/2007), 『국어의 풍경들』(1999), 『코드 훔치기』(2000), 『서얼단상』(2002), 『엘리아의 제야』(2003),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2006), 『말들의 풍경』(2007), 『바리에떼』(2007), 『도시의 기억』(2008), 『어루만지다』(2009), 『경계긋기의 어려움』(2009)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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