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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와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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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히로히토와 맥아더  일본의 전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저자명 : 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음|권혁태 옮김
서지사항 : 일본사|296쪽|변형국판|2009년 7월 27일
가 격 : 16,000 원


도서소개

히로히토는 어떻게 ‘전후’에도 폐위되지 않고 ‘평화’의 상징으로 군림했나?

힘없는 목소리로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전한 히로히토와, 파이프를 비스듬히 문 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모습의 맥아더. 이 책은 이렇게 다소 막연한 이미지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두 사람의 정치적 ‘거래 관계’를 밝혀낸 일본 학자의 연구서다. 지은이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1945년생, 현재 간사이가쿠인대학 법학부 교수)는 일본 점령 및 외교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연구로 잘 알려진 학자이며, 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권혁태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이 책은 지난 20여 년간 지은이가 일본 전후사, 특히 일본이 미국의 점령상태에 놓여 있던 시기에 히로히토가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분석한 결과물이 총망라된 저작[『昭和天皇․マッカーサー会見』(岩波書店, 岩波現代文庫, 2008)]이다.
히로히토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에 온 맥아더와 1945년 9월 27일 첫 번째 회담을 시작으로,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될 때까지 총 열한 차례 회담을 가졌고, 맥아더의 뒤를 이어 부임한 리지웨이와도 1951년 5월부터 일곱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지은이는 사실상 정상회담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회담들을 다룬 수많은 자료, 자료들 사이의 논리적 정합성을, 퍼즐을 맞추듯 정교하게 검토해 나간다.
히로히토는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에 대해 법적·윤리적 최고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는 침략전쟁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패전 후 전쟁범죄인으로 처벌을 받기는커녕 새 헌법(이른바 평화헌법) 아래서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 즉 ‘전쟁의 상징’에서 ‘민주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이와 동시에 전전에 타도 대상이었던 미국 군대의 주둔을 일본이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을 반공기지로 만든 셈이다.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히로히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려 했던 맥아더로 대표되는 미국과, 그런 미국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천황제를 사수하려 했던 히로히토. 이 ‘전략적 거래’의 대가로 히로히토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천황제를 지켜냈고, 미국은 일본에 거대한 미군 기지를 둘 수 있었다. 지은이는 이런 ‘전략적 거래’ 과정에서 미국이 했던 역할뿐만 아니라, 히로히토가 정치가로서 행했던 여러 논리를 매우 실증적으로 밝혀낸다. 다시 말하면, 히로히토를 맥아더로 대표되는 미국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로 그려낸다.

냉철한 정치가, 히로히토의 ‘리얼리즘’
히로히토는 패전 후에 천황제를 둘러싼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한다. 하나는 패전 직후 전쟁범죄인으로서 처벌받을 가능성이었다. 또 하나는 동서 냉전대결 구도에서 본격화된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배태될 수 있는 천황제 붕괴의 위기였다.
첫번째 위기에 직면했을 때 히로히토는 두 가지 논법을 구사한다. 하나는 자신은 전전에 ‘입헌군주’였기 에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으며, 침략전쟁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가 행한 짓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 주장은 ‘논리적’이고 공개적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주장이 등장한다.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주장은 도의적 차원이다. 그러니까 한편에서는 자신에게 전쟁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자신이 전쟁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 대립, 모순되는 주장을 교묘하게 교차 사용함으로써, 법적으로 전쟁책임에서 벗어났으며, 동시에 법적인 전쟁책임 회피로 발생할 수 있는 도덕적 비난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법적 면책 논리의 결정판이 도쿄재판이었다면, 후자는 『맥아더 회고록』을 통해 일본의 전후 사회에서 넓게 유포된 언설이다.
그런데 1940년대 후반부터 냉전의 흐름이 본격화되자 히로히토는 사회주의 세력이 종국적으로 일본의 안전보장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이것이 히로히토에게 찾아온 두번째 위기다. 그에게 안전보장의 위협이란 곧 천황제의 위기이며, 자신의 위기였다. 이 새로운 ‘위협’에 대해서 히로히토는 미군 주둔만이 유일무이한 ‘해법’이라고 진단하고, 미군의 ‘영구적’ 주둔을 위해 정치적 개입을 서슴지 않는다. 이 같은 히로히토의 노력은 정치개입을 금지한 신헌법의 규정에 위반되는 위헌 행위이다. 하지만 히로히토의 위헌 행위는 신헌법 제정과 그 후의 강화조약 체결과정, 그리고 심지어는 1960, 70년대에까지 이어진다.
히로히토가 미군 주둔 문제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히로히토의 시각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반도 정세를 일본의 안전보장 문제와 분리하는 관점을 가졌던 당시 수상 요시다 시게루와 달리, 히로히토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패하면 일본에서 ‘혁명’ ‘전쟁재판’, 천황제 타도로 이어질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과 천황제를 사수하려면 미군의 일본 주둔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래서 히로히토는 일본 측이 미군 주둔을 자발적으로 요청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일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은 그에게 관심 밖이었다. 그는 미군 주둔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 일각에서 나타난 미일안보조약의 불평등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억누르고, 강화조약 체결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 체결을 ‘음지’에서 실현시킨다. 히로히토에게 미일안보체제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국체”였던 셈이다.
한마디로 히로히토에게 도쿄재판이란 전쟁책임으로부터 면책시켜준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며,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배치된 주일 미군은 일본의 안전보장, 즉 천황제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현재진행형의 핵심조건이었다. 전후 세계에서 히로히토와 천황제에게 도쿄재판과 주일 미군은 사활적 구성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무엇보다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야스쿠니 신사 문제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천황의 지시로 만들어져, ‘천황을 위해 죽은 영령’을 기리는 국가 사당이다. 다시 말하면 천황이라는 존재와 분리할 수 없는 시설인 셈이다. 그런데도 히로히토는 1978년 이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다. 이는 수상의 공식적 참배를 주장하고 이를 옹호하는 일본 우파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일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지한 것은 당시 야스쿠니 측이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A급 전범을 합사했기 때문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A급 전범을 처형하고 그 대신에 히로히토를 살려준 도쿄재판에 대해 맥아더에게 ‘감사의 뜻’까지 표한 히로히토로선 야스쿠니 신사가 A급 전범을 합사한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히로히토에게 도쿄재판은 자신과 천황제를 살려준 ‘은혜로운 면죄부’였던 셈이다.

일본 전후사의 금기에 도전하는 연구
이렇듯 일본 전후사 연구에서 천황(히로히토)이라는 요인(factor)을 등장시킨 지은이의 접근방식은 히로히토가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후, 즉 전쟁 직후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일본 언론이나 연구자들이 금기시해온 영역과 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제 해명에 필요한 자료는 아주 적고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감히 말하는데, 전후 일본의 정치외교사 서술에 매우 커다란 ‘공백’이 있고, 이 ‘공백’을 메우지 않고서는 전후 일본사를 충분히 서술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 같은 ‘공백’이 장기간 ‘공백’으로 남겨진 것은 단순히 자료의 제약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많은 연구자나 언론인들의 ‘공백’에 대한 인식 자체에 있다. 구헌법 하에서 ‘입헌군주’였던 천황이 신헌법 하에서는 ‘상징천황’으로 변신했으니 정치주체로서 행동할 수 없다는 전제가 인식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만일 히로히토가 사실상 중요한 ‘정치적 행위’를 했다 해도, ‘터부’로 취급되어 분석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생각이 작동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이 같은 인식 차원에서 형성된 ‘공백’을 소위 ‘감정’ 차원에서 메워온 것이 다름 아닌 앞의 1절에서부터 검토해온 『맥아더 회고록』의 ‘신화’였던 것이다. 추측건대 “지지 않아도 될 책임”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점령군 사령관 앞에서 한 몸을 내던졌다는 ‘감동의 스토리’ 때문에 냉철한 정치분석의 눈이 가려진 것은 아닐까?
(본문 92-93쪽)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크게 놀랄 일은 일본의 전쟁이 아시아의 국가와 민중들에게 가져다준 엄청난 희생과 참화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쓰이 문서」에서 밝혀진 맥아더, 리지웨이와 히로히토의 회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민중에 대한 언급은, 일본 국민의 식량 문제나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 등,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오키나와는 포함되지 않는다)에 대해서이며, 그밖에는 공산주의의 침략이나 억압에 노출되어 있는 지역의 민중에 대해서뿐이다. 맥아더와의 1차 회담에서 히로히토가 “모든 책임” 발언을 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구에 대해서도, 어떤 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일까? (…)
지금까지 살펴본 히로히토의 ‘외교’를 ‘선견지명’이라고 평가하는 관점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은 자가, 그리고 설명에 대한 책임을 공적으로 다하지 않은 자가 정치과정에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런 상황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치가 가지고 있는 병의 뿌리는 한없이 깊으며, 일본 민주주의는 치유될 수 없을 만큼 미성숙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본문 166쪽)

이 책은 1940~50년대 한반도의 ‘운명’에 ‘일본이라는 요인’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민하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덧붙여 지은이의 치밀한 사료비판과 사료분석, 금기에 도전하는 자세,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역시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장별 내용 소개
1장은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나서 1년이 지난 1990년 초에 지은이가 잡지 『세카이世界』(2·3월호)에 연재했던 논문 「천황과 맥아더 회견의 역사적 위치(상, 하)」이다. 이 논문에서 지은이는 미 점령군이 본격적으로 진주하기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열린,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첫번째 회담 내용을 다룬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통설’이었던 『맥아더 회고록』의 서술 내용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수집 가능한 자료를 동원해 상세하게 검토해, 지은이의 ‘가설’을 제시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미 점령기의 맥아더·히로히토의 관계를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방식으로 등장한 ‘점령관리체제’라는 국제적인 틀 속에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회담에 내포될 수밖에 없는 ‘정치성’을 드러냄으로써, 히로히토가 신헌법에 따라 ‘상징천황’이 된 후에도 안전보장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문제’에 관계해 나가게 된 배경을 밝힌다.

2장은 1945년 9월 27일에 열린 맥아더·히로히토의 첫 회담에서 히로히토가 무슨 말을 했는지, 1장에서 제시했던 ‘가설’을 재검증한다. 2002년에 일본 외무성과 궁내청이 공개한 「회견록會見錄」 덕에 지은이는 원래 삭제되어 있었다는 부분에서 히로히토가 어떤 말을 했는지 거의 ‘결론’을 보게 된다. 또한 「도미타富田 메모」 같은 새로운 자료에 의해 지은이의 ‘가설’은 한층 힘을 얻게 된다. 히로히토의 발언 중 삭제된 부분은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지하게 된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3장은 2002년에 발표한 지은이의 논문 「쇼와 천황․맥아더 회견을 검증한다(상, 하)」이다. 이 논문에서는 맥아더·히로히토의 8차 회담부터 통역을 맡았던 외교관 마쓰이 아키라松井明가 남긴 「천황의 통역」이라는 문서(「마쓰이 문서」)의 중요 부분을 소개한다. 「마쓰이 문서」는 맥아더나 리지웨이와 회담한 히로히토의 ‘육성’을 상세하게 수록한 자료로, 지은이는 이 문서를 분석함으로써 점령 시기에 히로히토가 일본을 둘러싼 안팎의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혀 나간다. 지은이는 아사히신문사가 입수한 이 문서의 ‘사본’을 연구자 중에서 유일하게 열람, 분석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문서에 의해, 맥아더·히로히토의 회담 중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4차 회담의 전모가 밝혀지고, 히로히토가 본격적으로 ‘외교’에 개입하는 계기가 된 9차, 10차 회담의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두 사람에게 마지막 회담이었던 11차 회담에서 히로히토가 도쿄재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명했음이 밝혀진다. 이 발언은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지하게 된 배경을 푸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쓰이 문서」에는 리지웨이 최고사령관과 히로히토의, 일곱 차례에 걸친 회담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으로 히로히토가 한국전쟁을 둘러싼 군사정세에 얼마나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히로히토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절찬”이라 할 만큼 높게 평가했음이 밝혀진다.

4장은 1996년에 출간한 지은이의 책 『안보조약의 성립』에서 제기했던 ‘가설’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차 검증한 글이다. 여기서 ‘가설’이란 점령기에 히로히토가 ‘천황외교’라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를 펼침으로써, 전후 일본의 안전보장체제의 틀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재검증하기 위해 지은이는 점령기에 히로히토가 직면했던 위협을 두 시기로 구분해 논한다. 첫번째는 전범으로 재판에 기소될 것이라는 위기와, 헌법 개정 작업에서 대두된 천황제 소멸이라는 위기였다. 특히 ‘천황제 소멸’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지은이는 일본 점령에 관련하여 전권을 쥐고 있던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있었음에도, 왜 워싱턴에 헌법 개정 작업을 담당하는 극동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하게 되었는가를 해명한다. 극동위원회 설치를 분석하면서 지은이는 일본 점령이라는 좁은 틀을 넘어서 이탈리아 점령, 동유럽 점령, 독일 점령 등, 추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관리체제’가 유럽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짚고 넘어간다. 그리하여 일본 점령을 국제적인 맥락에서 자리매김함으로써, 왜 헌법 개정이 맥아더에 의한 ‘강제’의 형태를 띠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밝혀낸다.
히로히토가 두번째 단계에서 직면한 것은 공산주의의 위협이었다. 세계가 냉전 대결의 시대를 맞이할 무렵부터 히로히토는 안팎의 공산주의가 천황제 타도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일본을 침략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히로히토는 비무장을 규정한 헌법 제9조나, 기능을 잃어버린 국제연합으로 일본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미군이라는 ‘외국군’에게 천황제 방위를 위탁할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에서 ‘상징천황’이 된 후에도 헌법 규정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천황외교’를 전개했던 결정적 배경을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안보체제가 전후 일본의 새로운 ‘국체國體’가 된 것이다.



저자소개

지은이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1945년 일본 고베(神戶) 효고(兵庫) 현에서 태어나 교토(京都)대학 법학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 법학부 조수, 조교수,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법학부 교수를 거쳐, 2000년부터 간사이가쿠인(関西学院)대학 법학부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イタリア占領史序説 ― 戦後外交の起点』, 『日本占領管理體制の成立 ― 比較占領史序説』, 『安保条約の成立 ― 吉田外交と天皇外交』, 『パワー․ポリティクスと日本外交』, 『集團的自衛権とは何か』가 있고, 같이 지은 책으로 『安保条約の論理  ― その生成と展開』, 『占領改革の国際比較』가 있다. 옮긴이 권혁태(權赫泰): 1959년 대전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히토쓰바시대학 조수, 야마구치(山口)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있다. 릿쿄(立教)대학 초빙연구원, 규슈(九州)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황해문화』 편집위원이다. 같이 지은 책으로 『東アジアの中の日韓交流』(慶應大学出版会, 2007), 『朝鮮半島と日本の同時代史』(日本經済評論社, 2005), 『반일과 동아시아』, 『아시아의 시민사회』, 『동아시아 인권의 새로운 탐색』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재일조선인과 한국 사회」, 「일본의 이라크 인질사건과 ‘자기책임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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