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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긋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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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경계긋기의 어려움  고종석 시평집
저자명 : 고종석
서지사항 : 정치,사회|326쪽|신국판|2009년 2월 28일
가 격 : 15,000 원
비 고 :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도서소개

여항에 보내는 고종석의 쓴 소리와 참견

칼럼니스트 고종석이 2006~2008년에 쓴 시평(時評) 모음집이다. 이번 시평들 역시 시간적으로 볼 때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글이 쓰인 시기는 대략 이명박 정부 집권 1년, 대통령선거,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해당한다. 지난 2년여 동안 세상을 읽어내며 저자가 갖게 된 생각은 한마디로 ‘경계긋기의 어려움’으로 압축된다. 어떤 경계이고, 어떤 점이 어렵다는 것일까?

(…) 제2부에 실린 글 한 편의 제목을 옮겨와 책 표제로 삼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적잖은 수가, 살아가면서 경계를 긋는 것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경계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 보편주의와 문화적 상대주의의 경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경계,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 사이의 경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 윤리의 논리성이나 논리의 윤리성 속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 때, 그 수다가 삼성재벌의 탈법적 망동을 꾸짖는 것이라면, 그런데 친구와 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이 삼성 제품이라면,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우스꽝스러운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 자랑스러운, 그러나 최근 위협받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나는 이(利)와 의(義)의 경계가 어딘지도 때때로 잘 모르겠다. 김수영의 말대로,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 적들 앞에서, 나는 저를 보편주의자로 (잘못) 여기는 상대주의자 같기도 하고, 저를 자유주의자로 (잘못) 여기는 민주주의자 같기도 하다. (「책 앞에」, 4쪽)

삼성의 기업윤리는 조선일보의 기업윤리보다 나은가?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삼성은 조선일보보다 더 너그러운가? 그럴 거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서 쓰는 내가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한쪽은 그저 물질을 팔고 다른 쪽은 거기 사악한 정신을 끼워 파니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분명히 그런가? 그 둘은 늘 또렷이 구분되는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소시민으로서 내가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정확히 어딘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지천명을 코앞에 둔 나이에. (「경계긋기의 어려움」, 254~255쪽)

경계긋기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저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보면 혼탁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태도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늘 성찰해온 사람의, 강박에 가까운 닦아세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선 세상을 가리는 흐릿한 안개를 걷어내고 그 안을 또렷이 보려는 ‘격정’이 자주 엿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에 대한 환멸과 피로감을 가중시킨 노무현 정부 말기, 집권 후 1년도 되지 않아 ‘빅이벤트’를 줄줄이 내놓은 이명박 정부, 대선을 앞두고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던 ‘진보진영’,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사태였지만 거대 재벌회사의 눈치를 보느라 주요 일간지에서 외면했던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는 사뭇 매섭다.

경찰이 촛불시위를 거칠게 진압하고 KBS 건물에 난입하면서 공격성을 뾰족이 드러낸 뒤, 야당과 시민사회 일각에서 이명박 정권을 전두환의 제5공화국에 비유하는 일이 잦아졌다. 정치공세에는 과장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것은 위험한 언행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상대적으로) 덜한 악’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의 ‘절대악’을 두둔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박한 비유는 5공을 겪지 못한 젊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크게 왜곡한다. (…)
지금 이 정권은 그 ‘영광의 20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뤄낸 성과들을 허물어뜨리는 한편, 그 영광의 빛을 쬐지 못한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더욱 큰 절망의 구덩이로 내몰고 있다. 교육을 포함한 사회 모든 분야를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이 정권은 계급 재생산 기제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정연주를 KBS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면서, 또 MBC 〈PD수첩〉을 길들이려 하면서 이 정권이 보여준 난폭함과 조잡함은 시민적 자유의 핵심인 언론의 자유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에까지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친미 일변도의 서툰 외교는 당사국인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의 조롱과 경멸과 적의에 대한민국을 노출시켰다. 북한에 대한 대통령의 경솔한 발언은 남북관계를 김일성 사망 직후로 경색시켰다. 해외 요인이 깊이 개입했다고는 하나, 이 정권은 경제의 양적 성장조차 앞선 정부들이 이룬 만큼 해내지 못할 듯싶다. (…) 이 정권은 분명히 5공 정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노태우 정권까지 포함한 6공의 다섯 정권 가운데 가장 무엄하고 미련한 정권이다. 걱정이다.
(「허물어지는 ‘영광의 20년’」, 42~45쪽)

이번 시평집에선, 우리 이웃들을 향하는 저자의 다감한 눈길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컨대 다문화 가정의 여성(「아내의 언어로」),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김밥천국 이야기」), 일생을 세 가지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남자와 그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 한 여자의 죽음(「도린과 제라르를 위하여」)을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는 애틋하고 따뜻하며, 한윤형․노정태․최익구 같은 열혈 청년들을 이야기할 땐 너그러운 ‘질투’와 뿌듯한 희망이 느껴진다.

김밥천국의 가장 큰 매력은 24시간 연중무휴라는 점이다. 추석과 설 당일만 빼고 말이다. 심지어 추석과 설에도 반나절은 열려있을 때가 있다. 아주머니들이 차례만 지내고 나오는 것 같다. 몇 교대로 일을 나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들에게선 삶의 엄중함이 느껴진다. 때로, 내가 그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아닌가 송구스럽다. (…)
여느 음식점에 견주어 김밥천국엔 젊은이들이 많다. 앞서 말한 김밥천국의 매력, 다시 말해 메뉴의 다채로움과 밥값의 상대적 저렴함 때문일 테다. 허름한 옷차림의 비정규직 타입이나 짙은 피부색의 이주노동자들을 김밥천국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들이 삶에서 겪는 애환은 김밥천국 아주머니들의 애환과 겹칠 것이다. 노동다운 노동을 해본 바 없이 허릅숭이로 살아온 나는 문득 그들 사이에서 어색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두부는 행복의 보증이다.
(「김밥천국 이야기」, 178~179쪽)

다급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물결 속에 놓여 있을 때 예리한 통찰로 번뜩이던 시평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그 빛이 바랜 듯한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그런데 고종석의 세 번째 시평집인 이 책을 통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일들과) 과거를 되새김질해보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지닌 사유와 문장의 힘이 그만큼 크고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소개

■ 고종석 코리아타임스, 한겨레 신문, 한국일보 등지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일했고 현재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들로 『제망매』 『언문세설』 『히스토리아』 『말들의 풍경』 『코드 훔치기』 『서얼단상』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감염된 언어』 『바리에떼』 『도시의 기억』 『어루만지다』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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